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그리고 평가

신약학 개론
2018. 11. 08 
주제: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그리고 평가
 
바울의 생애와 사상
바울의 생애에 대한 두 개의 자료
-서신서들: 1차적 자료, 자신이 그린 자화상
-사도행전 : 2차적 자료, 타인이 관점에서 그려진 초상화
두 자료의 연관성에 대한 견해[1]
첫 번째 견해- 사도행전을 사실상 완전히 신뢰하는 견해
두 번째 견해 사도행전을 아주 불신하는 견해
세 번째 견해 다양한 성향의 중도적인 입장을 보이는 견해, 즉 같은 사건에 대해서 두 기록이 차이가 있을 때에는 바울 서신서의 기록에 보다 신빈성을 두는 견해.
보수주의에 속한 신학자[3]
비평주의 신학자
급진파 신학자[2]
13개 서신+ 히브리서[4]
7개 서신
4개 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출생과 성장
길리기아의 수도 다소에서 출생 (AD 5-10)과 어린 시절 성장, 초기 헬라 교육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22:3), 길리기아 시민권자, 로마시민권자(바울서신에는 로마시민권자란 주장이 없으나 이차 자료인 행전에 나옴), 디아스포라 유대인(고후11:22,3:5), 이스라엘인(11:1, 고후 11:22).
헬라어 실력 월등, 부친의 사업에 관련된 천막, 가죽세공 및 차양 제작에 대한 기술자, 이방 종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유대교와 유대교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 습득한자
예루살렘에서 명성을 떨쳤던 가말리엘 1세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행 22:3 주장은 증명이 필요함-바리세파 힐렐 계통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3:5, 23:6)
 
길리기아 도시: 스토아철학자 아데노도루스가 활동한 헬라대학이 있었던 2의 아테네수준의 시리아에서 소아시아로 들어가는 관문도시
바리새파의 두 분파: 엄격하고 보수적인 샴마이(Shammai) 학파, 조금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힐렐(Hillel) 학파 , 바울은 힐렐학파에 속함.
예수에 대한 믿음과 직접적 영향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는자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멸하려고 열심을 낸 바리새인
예수와 바울
바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은 드물고, 다메섹 도상에서 빛가운데 나타난 부활하시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 관형 증거하기를 원하였다(9:27).
스데반과 바울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하였다는 스데반의 설교에 격분하여 스데반의 죽음이후에 예루살렘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을 핍박할 명분을 얻음과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다메섹으로 가던중 도상의 사건에서 예수를 만난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와 만남에서의 차이점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9:6, 9:15, 22:10
아나니아-->사울
[이방인의사도]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26: 16-18
사울에게 직접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16-17,
22:12-16
바울 부르심: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바로? 다메섹 도성?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선교여행, 예루살렘회의, 안디옥의 영향
1차 선교여행(46-49, 혹은 37년후)
경로:안디옥 -> 실루기아 []> 구브로(Cyprus)-살라미 경유(육로) 바보 []-> 소아시아 밤빌리아-버가 (마가 요한이 떠남) -[육로]> 비시디아-안디옥 -[육로]> 이고니온 -[육로]> 루스드라와 더베 -[육로]> 루스드라 -> 이고니온 -> 비시디아-안디옥 -> 밤빌리리아- 버가 -[육로]> 앗달리아 -[]> 안디옥
 
선교여행을 통해 드러난 문제들:
새로운 믿음과 유대교와의 관계, 이방 크리스천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과의 관계, 이방 크리스천들의 율법, 할례 및 식사규례 문제(dietary law)
예루살렘회의(49, 47/51)
예루살렘 총회(Jerusalem Council)의 목적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행 문제, 식사규례 등에 대한 일부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반발을 해결하기 위한 모임(행전 15:20, 29, 21:25).
갈라디아서 21-10절의 기록을 보면, 바울은 그의 예루살렘 방문의 이유와 목적과 성과를 다르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계시를 인하여스스로 올라간 것이라고 그 이유를 기술하며, 방문의 목적도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바울이 이제까지 주의 계시와 가르치심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진행해온 복음사역이 과연 예루살렘 사도들의 것들과 부합되는가 확인하는 차원에서(“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밝히고 있다.
방문 성과에 대하여도,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공회장인 야고보의 권고 결의의 편지를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감당한 반면에, 갈라디아서에서는 게바와 요한과 야고보와 유대인의 사도로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듯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에게 복음 전함을 서로 인정하는 대등한 관계임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계속되는 2차와 3차 선교 여행(50-52, 54-58; 54년후)
바울이 게바를 면책한 안디옥 사건(Antioch event)은 예루살렘 총회(Jerusalem Council)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인다. 바울로서는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의 행동도 참기 어려운데, 그와 소아시아 지방의 일차 전도여행을 함께 하며 온갖 고생과 죽음 근처에도 같이 가본 바나바마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혹됨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여진다.
2차선교여행 경로: (15:36-18:22), (50-52, )
안디옥 더베: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 헤어져 실라를 데리고 떠남. 루스드라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 디모데를 만나 할례를 베품. 바울은 소아시아(터어키)지역에서 말씀전하기를 바랐지만, “예수의 영”(행전 16:7...성령, 신약성경에 유일한 표현)이 허락지 아니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전 16:9)고 청함을 듣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네압볼리로 간다. 그후에 빌립보로 가고 이곳에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와 그 가정에 세례를 준다. 빌립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전도한다. 그후 베뢰아: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의 시기로 밤중에 도피하여 베뢰아로 도피, 베뢰아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함(아가야 지방), 또 아덴(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만남, 그 후 실라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서 다시 만남. 철학자들과 논쟁함. 아레오바고의 관원인 디오누시오가 복음을 받아들임. 고린도에 이르러 장차의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고, 그곳에서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데살로니가전서 기록]. 실라와 디모데의 도착으로 힘을 얻음.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 전도. 바울이 아직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그를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나오는 데 그 당시는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주후 52-53)으로 있었다. 바울이 서원한 일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나 에베소를 거쳐서 가이사랴 -> 예루살렘 -> 안디옥에 도착.
3차선교여행 경로: 18:23-21:26, (AD54-58, 54년후)
수리아 안디옥 -> 갈라디아지방 -> 브루기아지방[제자들을 찿아 다이며 믿음을 굳게함] -> (윗지방) -> 에베소[두란노서원에서 2년동안 복음전함, 3년동안 체류함,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16:8), 눈물의 편지(고후2:3-4) 기록, 귀신 축출과 마술책들을 공개적으로 불사름,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동, 투옥중 빌레몬서빌립보서 기록] ->
오순절(57년이후) 에베소 ->드로아->마게도냐(고후2:12-13)[고린도에서 일어난 문제 중재를 위해 보냈던 디도를 만남, 고린도후서 기록] -> 고린도[3개월간 체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 모음, 로마서 기록]->
마게도냐 -> 빌립보 > 드로아 [삼층루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림] -> 앗소 > 미둘레네 > 기오 앞 > 사모 > 밀레도[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권면과 부탁을 함] -> 고스 -> 로도 -> 바다라 -> 구브로 옆 > 두로[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함] -> 돌레마이 -> 가이사랴[빌립집사와 예언하는 딸들을 만남,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함)] -> 예루살렘[예루살렘 도착과 3차 전도여행에 대한 보고, 결례를 행함]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됨, 가이사랴에 수감됨, 로마로 호송됨, 사망함
바울 생애의 마지막 6(58-64)의 대부분은 사도행전 21:15-28:31에 기록되어있다.
바울의 이방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나자 예루살렘교회 리더들(야고보와 장로들)은 유대인 그리스도들을 염려하여 바울에게 칠일간 결례를 행하는 경건한 처신을 요구한다.
바울이 결례의 이레가 차서 성전에 있을 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붙잡힘을 당하는데 바울 한 사람을 붙잡는데 온 성이 소동한다든지(행전 21:30)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21:31) 표현이 나타난다. 이로 인해 천부장이 백부장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온다(21:32). 천부장이 무슨 영문으로 소동하는지 몰라 바울을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명할 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밝힌다(행전 22:25-29, 23:27). 가이사랴로 보내져 바울은 2년간 감옥에 갇힌다.
베릭스의 후임 행정장관인 베스도는 재판을 열어 바울의 사건을 심리한다. 베스도는 바울을 심문함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유대인 종교와 관습을 잘 알고 있는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 2(주후 53-70년 통치)를 초청한다. 바울은 베스도,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동생-아내인 버니게 앞에서 그를 고소하던 유대인들 앞에서 행한 간증(행전 22:3-21)에 이어 두 번째로 다시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에 관하여 간증한다(행전 26:2-23). 베스도가 판결을 내리기전에 바울은 가이사에게 항소한다. 황제에게 항소했기 때문에 로마로 보내지고 험난한 해상여행 끝에 로마에 당도하는데 그곳 형제들이 압비오 저자(Forum of Appius)와 삼관(Three Taverns)이라고 하는 곳까지 죄수로 호송되는 바울 일행을 맞으러 나왔다. 2년간 비교적 자유로운 가택 연금을 당한다.
바울은 그가 송사한 대로 가이사(=로마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았을까? 그 당시의 황제가 네로(54-68)였던 것과 네로의 성격과 말기 기독교에 대한 편견으로 미루어보아, 바울이 네로 앞에 섰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재판을 받지는 못하였을 것이며 네로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죽음의 시기에 관하여는 로마에 2년 간 머문 후에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이 경우, 바울은 주후 62년을 전후하여 그의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62년 이후 죽음을 당하기 전에 바울은 디모데전서(2차 투옥 전에)와 디도서, 디모데후서(두 서신은 2차 투옥 이후)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본다.
바울은 과연 그가 계획하고 사모하던(15:28) 서바나까지 갈 수 있었는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는 온 세계에 의()를 가르쳤고, 서편 끝(the limits of the West)에 이르러서 통치자들 앞에서 증언(證言)했으며, 그는 세상을 떠나 거룩한 장소(Holy Place)로 들림 받았다--그는 가장 위대한 인내(忍耐)의 본이었다.”(1 Clement, 5:7)고 기술함으로써 서바나까지 갔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무라토리아의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에는 바울이 이 도시(=로마)를 떠나 서바나로 갔다”(38-39)고 기술하고 있다. 4세기 역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The Ecclesiastical History)에서 누가의 사도행전 종결을 언급하면서 덧붙이기를, “재판 자리에 선 후에 사도는 다시 설교 사역을 위해 떠났으며, 동일한 도시(=로마)에 두 번째 와서 순교를 당하였다.
 
바울에 대한 평가
바울에 관한 이미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장벽을 허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기독교의 보편화를 누구보다 크게 앞당겼다. 노예제도가 존재했고,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명확했던 당시 사회에서 연대와 평등의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우면서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고, 그대로 실천했다[5].
바울은 인생의 모든 면에서 투쟁해야했던 떠돌이 장인(Artisan)이었다.
바울의 동기
왜 바울은 이 모든 고통을 떠 맡았는가?
무엇이 그에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유대교 선민의식에 찬 종교심과 가르침에 열심을 내어 살고 있었던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박해하던 예수와의 극적인 만남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유대교를 향한 믿음 행위에 대한 신앙을 흔들어 놓았다고 본다.
다메섹의 도상에서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주님께서 만난 것은 그를 징계함도 아니고 그를 책망함도 아니었다. 주님의 목적은 그를 부르셔서 그의 종교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고 아울러 그에게 이방 민족의 선교라는 위대한 사명자로 부르신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의 살아있는 유산
바울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신실한 동역자들과 제자들에게 때로는 아버지로서(살전2:11),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어머니로서(4:19), 젖먹이는 유순한 유모처럼(살전2:7), 때론 형제자매로, 동역자이다(1:7).
바울의 편지들
바울 신학(서신)의 중심에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목적인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6].
바울의 제자들과 그들의 기록들
얽매이지 않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 바울은 대단한 집중력을 가졌고 감정의 폭이 넓은 사람이다. 또한 깊은 우정을 일으키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디모데, 디도, 실루아노, 브리스가(브리스길라), 아굴라, 오네시모, 뵈뵈, 루디아는 바울의 충실한 친구들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 신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받아왔지만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할애한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의 이미지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여섯명의 익명의 제2바울서신의 저자들은 바울이 죽음이후에도 1세기 말엽 교회를 향하여 지속적인 권위를 가진 사도로 묘사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바울이 마지막 시기에 큰 악을 직면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골로세서
새로운 깊이로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에 대한 바울의 주제들을 발전시킴
에베소서
바울신학을 발전시킴
디도서
목회서신, 교회의 구조에 대한 평범한 관심, 이단의 위험들에 대한 논쟁, 여성에 대한 평가절하로 인하여 가끔 바울 전체 작품들 중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것을 목회서신이라 불리도록 만든 목회적 관심을 강조함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참고자료
1. 류호성 옮김(레이몬드 E. 브라운 지음, 메리언 L. 소어즈 편집), 간추린 신약개론, 2018, p. 234
2.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바우어(F.C. Baur, 1792-1860) 와 그의 후속 역사-비평학자들
3.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 2013, 3
4. ibid
5.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2329 (김학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문학동네, 2016 서평)
6.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쿰란출판사, 20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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