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독교사 - 종교개혁의 확장

종교개혁의 확장
2017. 12.07 
1부 온 유럽으로 번진 종교 개혁
급진 종교 개혁
루터쯔빙글리같은 기존 종교개혁자의 개혁에 더 원론적인 운동을 주장했던 재세래파가 이끌었던 개혁운동을 말한다. 그 특징으로는 외부로 들어난 권위(비성경적이라고 보여지는)를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 점, 유아셰레를 거부하고 믿음을 고백한자들에게만 침례를 다시 배푼다는 점, 재산을 공동 소유하는 점(?), 그리고 평화주의와 무저항을 강조하는 점이 공통요소다.
고발 사건(1527년 취리히, 베른, 장크트칼렌의 시정부가 재세래파의 재산권에 이유로 고발한 사건) -->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재세례파를 좌익 종교개혁(롤런 드 배인턴)’이나 급진 공교개혁(조지 윌리엄스)’으로 부르곤한다. 이 급진 종교개혁을 루터와 개혁파의 개혁운동을 제도권 개혁과 정반대 운동으로 보기도한다.
운동의 중심에 있는 콘트라 그레벨쯔빙글 리가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를 받아들이는체하지만 사실 성경이 인정하지 않거나 규정하지 않는 수많은 관습 유아세례, 교회와 관의 유착, 그리스도인의 전쟁 참여 -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다는 쯔빙글리를 비판함.
그레벨같은 급진 사상가는 성경 해석에는 전통 혹은 과거와 이어진 어떤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말도 참조할 필요없이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함.
사도 계승권을 이어받아왔다는 카돌릭 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고 굳이 참된 교회가 아닌 저술가들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함.
루터와 칼뱅처럼 관을 등에 업은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이 주장하는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어떤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라도 보고 루터와 칼뱅이 중세 교회도 기독교회라는 입장을 반박하였다.
재세례파 저술가들은 성경이 특정하여 말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믿음과 관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급진 진영의 지도자인 발타자르 후프마이어<쯔빙글리와 나눈 대화>에서 이점을 강조하였다.
급진 종교개혁 진영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문서로서 미하엘 자틀러가 작성한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1527)인데 이 신앙고백의 기능은 재세례파재세례파 주위에 있는 자(카돌릭과 관을 등에 업은 프로테스탄들)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 고백서는 종교개혁 안팎의 대적자들을 구분해주는 믿음과 태도를 모아놓은 하나되게 해주는 핵심 역할을 하였다.
큰 재세례파 공동체의 본거지였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1530멜키오르 호프만의 설교로 시 당국을 뒤집어 엎을 것을 요구하는 자극적인 사건이 1934년에 발생했으며 재세례파 지도자는 이 도시안의 남아있는 모든 이에게 다시 세례를 받아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처형당할 것이라 선언함으로 도시를 점령하여 유럽전역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재세례파를 사회와 국의 안전과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게되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
헨리 8세 시기
1520년대 들어와 잉글랜드에서도 루터의 사상이 대학을 중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루터의 사상이 큰 호소력을 갖게 된 데에는 잉글랜드 자체내에서 태생한 종교운동으로서 교회생활의 여러 측면을 비판했던 롤러드파(Lollardy)의 영향도 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배경에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과 권력 이양에 따른 정치적 안정을 얻으려는 노력이 헨리 8세의 정략 혼인과 이혼 과정에서 잉글랜드가 교회와 별개인 지역으로서 독립성을 가지며, 잉글랜드 왕도 자율권을 갖으려는 일련의 설득 프로그램을 착수하게 된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윌리엄 워럼1532년에 죽자 후임으로 자신의 캐서린 (딸 메리 튜더가 태어남)과의 이혼 절차를 강력히 지원했던 토머스 크랜머를 대주교로 임명한다. 잉글랜드 법원은 16335월 아라곤의 캐서린헨리의 혼인을 무효로하고 앤 블린과 재혼을 통해 딸 엘리자베스 튜더가 태어난다.
이후 헨리1534년 여러법을 잇달아 시행한다
-왕위계승법(헨리의 자녀들이 왕위계승), 수장령(헨리 8를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 인정), 반역법(헨리8세의 수장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반역으로 정죄)
이런 행동들은 교황과 멀어지게 만들었고 인접 카돌릭 국가들로부터 침공 위협을 받자 방어조취로 헨리 8는 수도원을 해산하여 군비를 마련하고 독일 루터파와 군사 동맹을 목적으로 협상을 벌인다.
헨리 8세 시기의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특성
-본질상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통치행위 였으며 신학면에서 (카돌릭)보수주의자였으며, 실용적인 입장이었고,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 보장하여 그의 영토안에서 개혁 요소들을 억제하고 싶어했다. 반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신학적 기초에 기반하여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에드워드 6세에서 엘리자베스 1세 시기
헨리 8 사망이후에도 잉글랜드의 교회구조는 사실상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예배형식도 변하된 것이 없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제인 시모어(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의 아들 에드워드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되어 섭정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애 성공회는 독특한 프로테스탄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공회를 루터보다 쯔빙글리 및 취리히의 사상 쪽에 가까운 신학 노선으로 옮겨가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크랜머가 바꿔놓은 것중에 성찬 신학과 관련하여 1549년의 기도서 개정작업으로 개신교를 공고히 정착시키고자하였다. 크랜머는 유럽 대륙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이끄는 신학자들(피에트로 마르티레 베르밀리, 마르틴 부처)을 흠정 신학교수로 초청하여 잉글랜드 교회에 새로운 신학 방향 과 기초를 제공하게 했다. 이들의 초청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유럽의 종교개혁 특히 유럽 개혁파의 기반에 맞추어 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에드워드 6가 어린 나이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 메리 튜더가 계승한다. 이 시기에 메리 튜더는 헨리 8때 쫒겨난 레지널드 폴을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하며 카돌릭교를 회복시킬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한다.
-부유한 프로테스탄들은 잉글랜드를 탈출하여 제네바와 취리히같은 망명지에서 특히 개혁파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 망명기간은 신학에 능하고 열의가 강하여 그야말로 자신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길 기회만을 고대하던 5(Fifth Column)을 만들어 냈으며 저 유명한 제네바 성경(1560)을 이민 공동체가 내놓은 위대한 신학작품이다. 1558메리 여왕과 레지널드 폴 대주교가 죽자 앤 블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계승하게 됨으로 다시 종교안정을 이룰 조치들로 결국 프로테스탄트 국가교회의 모습을 더 확연히 드러내는 교회를 만들어내게 된다. 안정 조치의 기본 요소는 수장령인데 엘리자베스가 국가교회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고 교황의 권력을 모두 배제했다. 아울러 통일령은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종교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결국 여왕이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고, 교회가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며, 교회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하는가를 규정하게되었다. 이같은 엘리자베스종교 안정조치들은 다른 국가와는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 종교가 분열되지 않게 비취었다.
카돌릭 종교개혁
1520년대에 이르자 카돌릭교안에서도 개혁이 펼쳐졌다. 이는 북유럽에서 부는 카돌릭교에 대한 심대한 위협의 작용으로 카돌릭 교회 개혁, 갱신, 그리고 변형을 가리키는 말로 카돌릭 종교개혁(반종교개혁)으로 알려져있다.
카돌릭 종교개혁이 카돌릭도 아니고 동방정교회도 아닌 뭔가 빗나간 흠이 있는 세 번째 형태의 기독교를 의미하는 말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비 교회로서 진짜 교회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개신교의 개혁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트리엔트 개혁 공의회가 늦게 출발된 데에는 당시 주요 카돌릭 국가들이 갈등관계에 있어 특히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갈등으로 그런 갈등이 이탈리아안으로 들어와 주요 주교들을 모아 공의회를 열기가 힘들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루터가 개혁 공의회를 소집하여 관심사를 다루는 개혁 프로그램이 공의회주의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의 도전에 맞서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제안했다.
-성직 남용의 견제 (자신의 교구를 떠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음)
-사제들에게 적절한 신학교육과 영성 형성을 제공할 신학교 건립.
-피터 카니스 <요리문답>(1555)은 개신교진영의 내놓은 요리문답에 훌륭한 도전이 됨.
-수도회 개혁과 수도회 설립(13세기 초에 세워진 카르멜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여파로 개혁을 단행한 수도회의 한 예)
-이 시대에 중요한 수도회 하나인 에스파냐의 기사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설립한 예수회을 통해 기독교의 생명과 신앙을 변호하고 널리 전파하여 영혼을 자라게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예수회는 반종교개혁을 이끄는 힘이 되었고, 16세기 말에 아메리카와 인도, 아시아를 탐험하는 동안 펼친 선교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교회의 사상 비교
개신교 사상
카돌릭 사상
1. 볼가타 성경 번역 오류 지적
1. 트리엔트 공의회는 볼가타 역본 권위 선언
2.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성경해석 주장
2. 교회의 공인된 성경해석만 인정
3. 성경외에 다른 교회 전통 인정하지 않음
3. 구원교리에서 성경과 교회의 전통 모두인정
4. 이신칭의로 칭의관한 카돌릭 가르침 본질에 도전
4. 이신칭의에 관한 개신교의 가르침에 비판
개신교는 칭의를 죄용서로 한정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칭의가 변화와 갱신 개념을 아우른 것임을 간과했다고 반박.
개신교는 칭의는 죄용서와 의의 전가라는 사건으로 정의하고, 성화를 신자가 의롭게되어가는 과정으로 분리하여 주장
전가된(imputed) vs 나누어진(imparted)
5. 두가지 성례만 인정
5. 일곱가지 성례 모두 인정.
특히 화체설을 힘차게 옹호함.
이런 교리선언을 제시하긴했지만 이를 각 교구 사제와 회중에게 확실히 전달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점을 중요하게 인식한 공의회는 1546년 어린아이와 교육받지 못한 어른에게 전달할 요리문답을 만들어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여성과 종교개혁
한가지 중요한 변화가 성상화 차원에서 일어났다. 중세에는 동정녀 마리아 흠승(: ‘로사리오기도)이 대중에게 깊은 신앙(경건)의 척도로 호소력을 갖었으나 개신교는 교회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여성을 묘사한 성상화를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그럼에도 중세에는 왕족과 수도회 두 형태가 여자에게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역할을 맡은 제도였다.
왕가의 여자들은 카돌릭교와 개신교안에서 한 국가의 종교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을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엘리자베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 나바르의 잔 달베르등이 있다.
중세 여성의 중요한 목소리를 내게해 준 수녀회 조직을 통해서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은 여성 신앙서 저자들이 상당한 영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수도회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로 인해 여자들은 교회와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할 수가 없게되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혼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성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했다.
 
2부 종교 개혁 이후 시대
신앙 고백주의: 두 번째 종교개혁
유럽의 군주들은 종교 갈등으로 나라와 지역의 안정을 위협받게 됨에 따라 이런 갈등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국가 공인 교회만 허용하고 다른 종교는 허용되지 않는 교리 선언으로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을 구속하고 그 지역의 제후나 통치 책임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종교법을 규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국가교회 시스템을 발동시켜나가기 시작했다(-엘리자베스 1가 다스리던 잉글랜드). 이로 인해 많은 점에서 중세의 기독교 세계(Christendom)라는 개념을 재인식하여 각 지역에 적합한 미니 기독교 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지역 교회들은 성경 과 신경을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여겼지만 이런 지역 교회들의 독특한 믿음이나 관습을 분명히 밝힌 그 지역의 신앙고백도 중요하다고 인정했다.
1570년대 프로테스탄트 국가교회의 등장은 개혁성에 손상을 입히게 될 교회와 정치권력의 유착 과 종교=국가 이념 정체성으로 종교전쟁으로까지 연결된다.
나름의 신앙고백을 가진 주요 두 교회-루터주의 와 칼뱅주의-를 구분해야할 필요가 생기면서 이 교회들이 신학이나 전례나 교회 정치면에서 드러내는 차이점들은 초기 근대국가들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 속에서 더 큰 사회적 통제권을 행사하려고 정치 문제로 둔갑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돌릭 교회
 
루터파
실제 임재개념
칼뱅파
이중예정교리
루터 공동체,
칼뱅 공동체
사회와 정치 차원에서 구분이 힘들며 교리적 대결로 정체성 확립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체계처럼 신학체계를 발전시는데 관심이 집중됨
본문 증거 삼기 식 성경해석으로 기존 교리체계를 뜯어 맞추는 식으로 해석
 
잉글랜드와 북아메리카의 청교도주의
칼뱅의 영향을 받은 잉글랜드내의 급진성 프로테스탄트가 보기에 엘리자베스 1가 추진한 종교 개혁(종교 안정 조치)은 전통적 교회구조를 답습하였다.
이제 성공회안에서 생각을 달리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가리키는 말로 청교도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안정 조치에 맞서 십자가로 성호를 긋는 관습, 성직자 복장을 입는 관습, 예배때 반지를 사용하는 관습, 예수의 이름으로 절하는 관습에 반대했다.
스콜트랜드의 제임스 6엘리자베스 1를 이어 왕권을 받게 됨에 따라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16034월 에딘버러에서 런던으로 가던 제임스 왕에게 천인 청원을 제출하여 변화를 요구했지만 청교도주의를 외면했다.
청교도주의는 제임스 6세 시기와 찰스 1세 치세기에도 계속발전 했으며, 군주들의 독재자같은 행태가 대중들의 분노를 사게되었고,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개념에 청교도 저술가들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왕권절대주의임을 지적했다. 왕을 비판한 청교도들은 공화주의 장점을 부각시켜주었으며 소외당하던 향신(gentry)사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시작했다.
청교도주의는 잉글랜드 노팅엄셔 스쿠르비 출신의 청교도 회중들처럼 이제 더 이상 잉글랜드에 국한되지 않고 고국을 떠나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 허드슨 계곡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62011필그림 파더스는 매사추세츠 케이프코드에 도착 , 플리머스 록에 상륙하여 청교도의 뉴잉글랜드 공동체를 세웠다. 러나 필그림 파더스가 이 시대 잉글랜드 청교도의 전령은 아니었다. 그들은 분리주의자로서 그들의 신앙은 칼뱅보다 독립 교회형태인 재새래파의 특징이 더 많았다. 이 시기 잉글랜드 청교도는 대부분 장로교 신자였으며 교회 운영은 모교회가 여러 개척 자교회를 관리하는 관념을 유지했다.
1620년대와 1630년대 뉴잉글랜드 개신교의 초기 역사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대다수 청교도 공동체가 뉴잉글랜드에 도착한지 수개월 안에 장로교식 정치 제도를 포기하고 대신 회중 정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이들은 유럽 국가 교회의 엄격한 수직 위계 구조에 강력 반발하여 민주적 회중주의를 채택했다. 지역 회중들은 고도의 분권주의를 지향하는 회중 교회 질서를 발전시켰다.
로저 윌리엄스(1603-1684)는 순수한 분리주의 교회를 주장한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성공회를 배교자라고 주장하고 성공회와 갖는 모든 교제는 중대한 죄라고 주장하여 기독 신자는 배교한 교회와 세속 국가에서 떨어져 나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와 국가 상호 영역침투에 환멸을 느낀 윌리엄스는 1636년 로드아일랜드 식민지를 세우고 완전한 종교 자유를 주장했다.
 
기독교 영향: 문학과 예술 과 과학
킹 제임스 성경 번역(1611)
잉글랜드교회가 종교와 문학분야에서 이룩한 중대 업적 가운데 하나가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역본출판이다.
1525년 윌리엄 틴데일 신약성경 번역 --> 1539년 대성경(Great Bible) --> 1568sus wnry 성경(Bishop’s Bible) --> 1611KJV
역본의 탄생 배경에는 잉글랜드에서 종교 간 평화를 확보하고 싶어했던 제임스 1세의 욕구였다. 16041월 햄프턴 궁회의석상에서 성공회 신자들도, 청교도들도 예상치 못한 성경 번역을 결정하였다. 제임스 1세는 이런 새 성경 번역본이 잉글랜드 안에서 종교적 통일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리라고 믿었다.
번역 총책임자로 캔터배리 대주교 리처드 밴크로프트(1544-1610)는 번역자들의 번역을 규율할 규칙을 제시하여 번역자들의 자유를 제한했다. 예를들면 오랜 교회 용어는 그대로 보존해야한다. ’church’라는 말을 ‘congregation’으로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제시하였다. KJV 역자들은 대체로 성경 원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영어식 표현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장들을 사용하였다고한다. 이런 문자 중심 번역은 KJV이 보여주는 두가지 흥미로운 특징의 기초를 마련해준다. (1)원문 단어(고딕체) 와 원문에 없는 추가 단어(작고 덜 두드러진 활자체)의 구분된 표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구문적으로는 필요하긴 하지만 신학적인면에서는 덜 중요함을 일러주었다. 또한 (2) KJV 역자들은 원문을 의역하면 원문을 더 훌륭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경우에도 원문의 단어가 가진 특성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히브리어 문구와 그리스어 문구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결과 영어를 그 문구에 맞추려고 뜯어 고치는 과정에서 영어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영어 표현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어 문학 지경을 넓혀주었다.
기독교와 르네상스 예술
중세에는 예술 (혹은 형상= 아이콘)이 기독교 사상과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널리 인정했으며, 16세기와 17세기 카돌릭 교회도 이점을 계속 강조하여 교회 건축, 조각, 벽화, 그림들을 통해 종교개혁에 맞서 신도들에게 교육과 신앙심을 자극하려고 노력했다. 카돌릭 종교 개혁 때 종교 미술과 종교 음악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하지만 개신교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미술과 음악을 해석하여 세속 세계에 국한시키는 경향을 띄었다. 루터와 그의 동지들은 종교개혁 사상과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종교 예술이 중요성을 확신했지만 츠빙글리칼뱅은 종교 예술을 우상숭배와 같다고 여겼다. 하지만 신학적인 아닌 부분에서 개혁파 예술가 활동에 대해서 칼뱅은 그림과 조각도 그 표현 대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허용된다고 보았다. 신학적 주제가 아닌 자연 풍경, 사는 고장의 모습, 집안 광경 그리고 17세기 플라드르 미술의 독특한 특징인 초상화같은 영역에서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종교 음악
루터
잉글랜드 개신교
예배 때 시편에 근거한 송가(Psalmody)음악 사용 매우 존중
잉글랜드 개신교는 루터처럼 시편이 아니라 사람이 지은 찬송을 활용하면 하나님의 작품이 불완전하거나 부적절함을 암시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거부.
직접 찬송 모음집 <작은 영가집> 1524년 펴냄
예배 때에는 찬송(Hymnody-사람이 지은 가사에 사람이 지은 곡을 붙인 송가)을 포함시키지 않고 송가만 허용
예배 때 악기사용허가
예배때 악기 사용 금지, 무반주 시편송가
존데이의 <시편 송가집> 2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널리 사용됨.
독일/오스트리아 바흐같은 음악가 배출
성경을 음악으로 옮기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여김. 이론 인해 그가 작곡한 칸타타와 수난곡들은 풍성한 음악전통을 발전시켰다.
바흐는 1717-1723년까지 개혁파에속하는 안할트쾨텐 궁정악장으로 일했으며 이때 바흐는 종교음악보다 세속 음악에 집중했다. 이시기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등 작곡함.
 
기독교와 과학
과학적 방법의 등장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한가지 테마는 우주가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는 질서를 처음부터 갖고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근본 믿음에서 출발했다.
천문학분야
이집트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 천동설(지구중심설) 주장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루니쿠스: BC2세기부터 나온 주정 ->16세기 지동설(태양중심설) 주장
일부 신학자들은 지구가 태양 둘레를 회전한다는 주장이 성경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유는 시편 931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 지구가 정지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성경 읽기 방식을 천동설에 입각한 이런 가설들에서 해방시켜야했다.
1540년대 장 칼뱅은 피조세계가 질서를 갖추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과학적 자연 연구를 장려했다. 자연계와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언한다. 더 중요한 것은 칼뱅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관련이 있으며 인간의 생각과 마음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추셨다(적응)고 주장한 점이다. 이같은 칼뱅의 접근법은 17세기 과학 이론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갈릴레오 지동설 주장을 둘러싼 개신교와 카돌릭교의 논쟁
과학 대 종교의 논쟁을 넘어 성경해석에 큰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갈릴레오(1564-1642)의 주장이 성경 본문 (10:12 - ...여호수아의 명령으로 태양이 멈춰선 일)에 어긋나며 프로테스탄트의 오류(교회의 성경 해석을 바꾸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하였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은 자연계의 질서(규칙성)와 체계(이해가능성)를 설명해주는 무언가가 세계안에 그리고 인간 지성의 본질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지동설이 본격적으로 역전된 것은 행성의 타원 운동설로 천체의 움직임을 간결하게 설명한 요하네스 케플러(1557-1630)의 시대였다.
이렇게 셰계에 질서가 있으며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을 가졌다는 인식은 과학 차원은 물론이요 종교차원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종교 전쟁
프랑스 종교전쟁(1562-1598)
프랑스내에서 칼뱅파가 신흥 상공업계층과 정치적 싸움에 결부된 귀족그룹에 큰 영향력을 갖게됨에 따라 이에 대한 적대감이 폭발하여 성 바르톨로유의 학살로 상징되는 위그노 전쟁이 발생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종교 갈등은 17세기 전반에 일어났다.
잉글랜드 내전(1642-1651)
청교도와 성공회는 잉글랜드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전투를 벌였다. 제임스 1 뒤를 이은 찰스 1는 더 성공회적 성향을 갖었고 자신을 의회위에 있는 절대군주로 여겼다. 스콧트랜드, 아일랜드와의 전쟁을 계기로 빚어진 의회와의 갈등으로 잉글랜드 내전이 발생했다.
16428월 내전은 처음엔 찰스 1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의회군이 신 육군 모델을 만들어 역전당하고 결국 스콧트랜드군에게 항복하여 1649년 처형당함으로 공화정시대가 잠시나마 우위를 갖게된다.
독일 내전 30년 전쟁 (1618-1648)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따르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따르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전쟁은 초기에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더 규모가 커지고 일반적인 전쟁으로 발달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 논쟁에 짜증을 내는 이들이 늘어갔고 종교는 국가정책의 문제라기보다 사사로운 믿음의 문제가 되어야한다는 계몽주의의 주장이 등장할 무대를 열어주었다.
지식인 세계와 정치인 집단은 모두 종교를 국제 갈등 및 국내 갈등의 근원이요, 짐으로 여겼으며 광신을 싫어하는 분위기가 등장했고, 종교 자체를 싫어하는 태도롤 옮겨가게 되었다.
 
질문들
1. 종교적인(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신앙적인) 차원에 잘못된 결정으로 관철된 많은 법과 규정, 제도와 시행들의 결과론적으로 시간을 두고 봤을 때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선의의 결과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처음부터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가?
2. 종교개혁 이후 발달하게 된 이성에 기초한 합리주의적 사상과 실용적 계몽주의로 나아가는 시점에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교리 중심으로 카돌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집중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을 작은 그릇에 담아버리지 않았는가?

댓글

전문인 직업으로 선교에 동참하시길 원하십니까?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세계관

선교와문화인류학(폴 히버트) – 비판적 상황화(7장)와 자기 신학화(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