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독교사-유럽의 형성: 야만족들의 회심(AD. 500-1500)

세계교회사 발제 주제: 유럽의 형성: 야만족들의 회심(AD. 500-1500)
ref. 맥그라스 pp. 158-189 2017. 10.18(
 
1: 로마인 선교(AD 0 400), 2: 야만인 선교 (AD 400-800)
3: 바이킹족 선교(AD 800-1200) 4: 무슬림 선교(AD 1200-1600)
중세전성기의 배경
 
중세의 시작은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서로마제국이 막을 내린 시점에서 시작된다고 본다(훈족 ->동고트족 , 서고트족 침공-> 게르만족 이동->452년 공격 받음, 서로마제국 멸망 원인).
중세의 종언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시점이나 1450년 인쇄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가 활자를 발명한 사건이나 대항해 탐험 시대가 막을 연시기로 본다.
중세의 교회사를 다루는 시기는 대개 10001500년에 이르는 시기에 초점을 맞추지만 중세 전성기의 배경이 된 500년에서 1000년에 이르는 샤를마뉴치세기동안에 눈부신 발전이 이뤄졌다.

로마 몰락후의 서수 기독교
서로마제국 황제 로물르스 아우구스투스의 강제퇴위로 행정체계가 무너지고 권력이 지방통치자들에게 분산됨으로 중앙집권 정부 시스템 몰락했으나 교회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기독교가 제국종교로 공인받으면서 주교가 정치적권위와 영적권위를 함께가지는 조직체계로 발전했다.
4세기 중엽에 대교구 주교인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주교는 다른 지역의 주교들보다 우위적 권위부여를 받은자로 인정받게되었다. 이중에서도 로마 주교는 로마제국의 수도 와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로 인해 시리치오 주교(AD. 384-399)rk 교황 칭호 사용에 대한 규정 제정하고 교서로 발표하였다.
종교적 권위가 로마에 집중되는 현상은 402년부터 417년까지 재위했던 교황 인논첸시오 1세하에서도 지속되었다.
이처럼 로마에 영적힘과 정치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은 제국의 행정체계 붕괴후 이를 대신할 권력구조가 없었는데 강력한 교황은 권위를 강요했다.
레오1세 교황(AD. 440-461)은 이론과 실제 차원에서 교황의 권위를 공공히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교황 칭호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로마 주교의 적통은 예수님의 후계자로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를 이은자이기에 교황이 교회를 지탱하는 궁극의 기초이다라고 주장함.
6세기말에 서유럽에서 교회가 로마제국의 몰락후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국제조직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 교황(AD 590-604) 재위시 선교활동이 늘어났으며, 기독교 세력권과 영향력을 늘려주고 사회통합의 매개자로서 교회가가 갖는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교도인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고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을 선교사로 파송함으로서 이탈리아바깥 교회에대한 교황의 통제권 확립의 기초를 세움.
-기독교는 로마가 잉글랜드를 다스리기이전부터 잉글랜드에 있었으며 그레고리오1세의 전략은 모든 교회가 로마에 있는 교황의 권위에 복종케하려는 것이었다.
그레고리1세이후에도 교황의 교회 통치권을 확립하고 교황의 세속권위를 확대하는 이를 계속이어나갔다.
 
켈트 기독교의 발흥
유럽의 켈트족 거주지역: 아일랜드, 스코트랜드, 콘윌, 브르타뉴, 그리고 웨일즈
켈트기독교의 발흥지는 웨일즈 지방이었지만 5세기-6세기 아일랜드 지역이 선교중심지가 됨. 그중 가장 두드러진곳이 5세기에 니니안 주교가 세운 칸디다 카사로 로마령 브리타니아 경계밖에 위치해 로마의 여러 기독교 형태가 따르는 규범 준수할 필요없이 활동이 가능함.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하는데 기여한 인물로는 로마령 브리튼 사람으로 패트릭 순회전도자(AD 389-461)로 아일랜드의 기독교를 공고히 다지고 발전시킨 인물이다. 유목부족사회형태였던 아일랜드의 생활 방식이 수도원 제도가 잘 들어맞았고 수도원 제도가 교회권위 변두리에 자리하는 경향이 있지만 수도원 제도가 교회의 주된 형태로 급속히 자리 잡았다.
이처럼 켈트족 기독교안에 나타난 권위구조는 로마브리타니아 교회 지배 형태와 매우 달랐다. 주교가 교회 행정을 장악했던 로마의 주교중심 모델에 비해 아일랜드 수도원 중심 모델로 외부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로마의 주교 제도는 이지역에서는 변두리로 몰려났다.
신학적 측면에서 켈트기독교도 자연계가 하나님을 아는 수단으로 중요하게 여김. Patrick's Breastplate(패트릭의 흉배)의 송가 내용은 하나님을 아는 수단인 자연계를 잘 이용하고 있다.
송가 일부 소개....
(중략) 나는 오늘 나에게 맵니다. 나를 붙들고 인도할 하나님의 능력을, 지켜볼 그의 눈을, 머무를 그의 힘을, 나의 필요를 들을 그의 귀를; 가를칠 나의 하나님의 지혜를, 인도할 그의 손을, 방어할 그의 방패를, 강연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보호가 될 그의 천군 천사들을. (중략)
아일랜드의 순회전도자 브렌단(AD 484-577)과 콜룸바(AD 521-597) 바닷길로 스코트랜드 북쪽과 서쪽 섬선교, 콜룸바는 아일랜드 북부와 스코트랜드 서쪽 섬들에 기독교를 전했으며, 여기서 기독교는 남쪽과 동쪽으로 뻗어나가게되었다. 아이단() 수도사는 이런 방식으로 선교했던 훌륭한 본보기이다. 노섬브리아 지역, 잉글랜드 동북부 해안 린디스섬에 선교수도원 건립과 프랑스로 침투하기 시작하여 유럽지역에서도 점차 영향력을 키웠다.
켈트 기독교와 로마 기독교의 갈등 문제: 주교제도를 위협했고 기독교를 세상문화가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종교로 만들어 갔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울하는 규범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콜룸바가 죽은후에 597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고자 캔터베리의 아우그스타누스를 잉글랜드로 보내어 로마의 기독교 형태를 확고하게 한다. 그리하여 켈트 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잉글랜드 북부의 교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잉글랜드 동북부에 있는 고을 스트리에이니샬치가 앵글로색슨족 귀부인 힐드가 한일로 명성을 얻었고, 잉글랜드에서 로마기독교의 제도적 우위를 확립한 휫비 공의회(AD 664) 였다.
6세기에 일어난 색슨족의 잉글랜드 침공은 켈트 문화의 독특한 기독교 접근법을 브리타니아 변방으로 밀려나갔기 때문에 쇠태하기 시작했다.
 
7세기: 이슬람교와 아랍의 팽창
이슬람교는 무함마드 사망직후 펼쳐진 정통 칼리프조시대(AD 632-661)에 무력 정복으로 교세를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 시대가 이슬람 역사의 황금시대로 여긴다. 이렇게 교세 확장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 주변 지역의 취약성과 투쟁에 비록한다. 640년에 칼리프의 힘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미쳤고, 642년에는 이집트, 643년에는 페르시아제국까지 미치게 되었다. 5대 교구중 셋이 이슬람권안에 놓이게 되어 기독교 신학과 정치 행정의 중심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슬람교가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한 두 번째 시대는 마마스커스를 근거로한 우마이야죠 시대(AD 661-750)시대인데 이슬람 군대가 북아프리카 해안을 넘어 서쪽으로 진군한뒤 지브롤티해협을 건너 에스파냐에 터전을 삼아 유럽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런 확장은 732년 투루전투에서 아랍군대가 패하면서 끝나게된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고, 중세 기독교가 고전 철학과 과학을 재발견하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이슬람교의 등장은 기독교신학자들에게 지적 자극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신학자들에게 그들의 사상, 특히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사상을 발전시키는 지적 동기를 부여했다. 중세신학은 그 시대 이슬람 학자들, 특히 알가잘리(AD 1058-1111)와 이븐시나(AD 980-1058)가 제기한 문제 즉 하나님의 자유에 관한 논쟁들이다.
 
샤를마뉴 시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의 국가인 프랑크 왕국의 대왕인 카를로스 대제는 서로마제국이 몰락한뒤 지방으로 흩어져버린 권력을 다시 중앙에 집중시켰으며, 이탈리아, 프랑스, 와 독일에 걸쳐 새로운 정치 실체를 만들어내었고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으로 발전하게됨.
땅탈이 페펭과 새를마뉴를 향한 교황의 지지는 이들의 권위를 확고히해주었으며, 7991225일 교황 레오 3세가 샤를 마뉴를 임페라토르 로마눔(로마인들의 황제)’로 칭하고 재관을 씌워줌으로 서유럽에 기독교 국가인 로마제국이 다시 들어서는 중요한 상징성을 띈다. 이 진전은 유럽의 영적 지도자요, 세력 중재자로서 교황의 위치를 공공히하고 교회가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해주었다.
샤를마뉴의 중요한 업적: 전진해오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줌, 8세기와 9세기 사이에성직자들가운데 문화적 부흥기(카롤링거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됨. 주된 요인으로는 수도원의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갖게됨. 서유럽 전역에 걸쳐 학문의 중심인 수도원에서 필사본이 생산되었고 교회가 이런 지식 르네상스를 탄생시킨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함.
 
수도원 학교와 성당학교의 등장
5세기말에 들어와 로마제국의 전통 교육제도가 무너지면서 주교들은 성직자들이 양질의 교육을 확실히 받을 수 있게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를 발전시켰다.
6세기와 7세기 에스파냐에서 시작한 성당학교는 잉글랜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성직자 신학교육이 필요하게되었다. 처음에는 잉글랜드 켄트의 캔터베리(AD597) 와 로체스터(AD 604)에 세워졌고 곧이어 잉글랜드 북부 요크 민스터(627)에 큰 학교가 세워졌다. 그다음로 성당학교의 건립은 프랑스였으며, 파리 성당학교는 12세기에 이르러 파리대학교가 된다.
그러나 이런 성당학교만이 배움의 유일한 중심지는 아니었다. 베네딕트회 소속인 수도원학교가 발전하였다. 베네딕트회 영성에는 세 요소가 특별히 중요했다: 전례기도, 손으로하는 노동, 렉티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나중에는 성경 본문을 손으로 필사하기 위한 필사실과 도서관을 세워 후세에 전해줄 목적으로 정성들여 베껴 쓴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비잔티움 기독교: 단성론과 성상 숭배주의
6세기에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학 수완을 발휘하여 두 진영의 의견(단성론 과 성상 숭배)차이를 최소로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유럽의 정통 기독교회와 이집트, 에디오피아, 시리아, 아르메니아에 있는 교회 그룹(동방정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시대에 벌어진 가장 중대한 다툼은 기독교 예배와 섬김에 성상(icons)이 차지하는 비중과 관련되어 있다. 동방정교회는 공예배와 개인의 사사로운 신앙생화에서 성상을 인식의 창으로 사용한다는점. 그러나 이런 관습은 8세기와 9세기에 벌어진 성상 파괴논쟁때 혹독한 비판을 받음.
첫 번째 성상 파괴 논쟁: AD 730년경 황제 레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 입구에 자리한 그리스도 형상을 제거하라고 명령했고 레오는 교회지도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철거함.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성육신 교리가 예배와 신앙생활에 성상을 사용하는 것을 강력히 믿받침해주는 신항근거라고 비판했으나 래오가 성상에 보인 적대감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도 계속 이어가다가 결국 787년 여제 이레네(AD 752-803)에 가서야 종결되었다.
성상 파괴의 논쟁이 가져다 준 신학적 문제들: 성상 예베도 우상숭배인가? 2차 니케아 공이회에서 엄격한 의미의 예배와 약한 의미의 예배를 구분하여 대중의 신앙 생활에 적용되었으나 다시 815년에 한 황제가 성상 파괴를 되살렸다. 이런 일을 벌이게 된 동기가 분명치 않지만 여제 테오도라가 843년에 성상 복구를 선언함으로 종결되었다.
 
9세기의 논쟁: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와 예정
9세기에 이르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코르바 수도원은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 중심지가 되었다. 수도원의 학자와 사상가 가운데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AD 785-865)와 라트람누스(AD. - 868)<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관하여>란 책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에 관하여 정반대되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라드베르투스 견해: 성찬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주장(화체설) --> 물리적 사실이며 영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봄.
라트람누스 견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상징일뿐이다라는 주장 --> 평범한 빵과 성별한 빵의 차이는 신자가 인식하는 방식에 달려있다고 봄.
예정에 관한 논쟁: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도록 적극 예정하셨는가? 아니면 그들이 다만 구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일뿐인가?
아우구스티누스 견해: 예정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다룸. 일부 사람만 구속하겠다는 결정은 이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구속하겠다는 결정과 같음.
오르베의 고데스칼츠(AD 804-869) 견해: 후대에 칼뱅과 칼뱅 추종자들 추종자들이 전개한 이중 예정론을 전개. 그리스도가 영원한 형벌에 처하기로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점을 강조함. ,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주장함.
 
정교회의 동유럽 선교: 불가리아와 러시아
서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북쪽 나라들의 대다수 사람들은 점차 다양한 형태의 이교 신자로 돌아가버렸다. 9세기에 이르자 불가르족 과 마자르족들은 어려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게된다. 서쪽의 프랑크제국의 압박, 동쪽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압박으로 유럽 동남부 민족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하는 처지였다.
샤를마뉴 황제의 손자인 루트비히 2(AD 806-876)rk 불가르족과 동맹을 맺음으로 이 지역 세력 균형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웃한 슬라브족 지역에 있던 대모라비아의 대공 라스티 슬라프는 동쪽의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맺기로 결심하고 선교사 요청함. 슬라브 방언에 익숙한 두 형제 키릴루스 와 메토디우스를 파송하여 모라바의 수도인 벨레흐라트에서 기독교문헌을 번역 보급함. 그러나 모라바 지역은 콘스탄니노폴리스에서 나온 정교회보다 로마에서 나온 카돌릭의 영향 아래들어갔다. 나중에 볼가르족은 자신이 세운 대주교를 자치적으로 가질 수 있는냐는 문제로 로마 카돌릭에서 정교회로 선회한다. 이 모델이 특히 러시아에 비잔티움 기독교의 사상과 관습을 확산시키는데 영향을 주게되었다.
9세기에 비잔티움이 파송한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키에프대공국(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많은 지역에 해당)이 개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첫 개종은 988년에 일어남. 이해에 키에프대공국 블라디미르 1세 때 정교회가 정식으로 국교로 인정되었다
 
10세기: 제도의 쇠락과 부패
교회는 카롤링거 르네상스때 예술과 학문의 보호자요 사회 전체를 안정시키는 영향력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레고리오 1세가 발전시킨 교회조직 모델의 서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정착되어갔고, 858867년 재위햇던 니콜라라오 1세 교황은 세속 권력과 영적 권력을 함께 가진 인물로 등장했다. 니콜라오 1세 사망후 약하고 타락한 교황들이 등장하게됨. 샤를마뉴 사망이후 제국은 다시 분산되었고 지역에게 통제권이 넘어갔으며 지역 귀족들이 영적 해택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얻길 기대하며 지역 주교를 임명하는 소위 성직 매매라 부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교황의 역사속에 존재한 이 타락한 시기에 마침표를 찍은 황제가 오토 1(신성로마제국 황제)이다. 요한 12세 교황의 무능과 정치 음모로 교황자리에서 물러나게됨. 교황의 폐위는 10세기이후에는 더 잦게 발생하였고 이런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 개혁운동이 교회 여러 부분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교황권을 회복하려고 1050-1080년 동안에 교황청 자체(교황 이노센트 3)에서 일어난 수도회 개혁, 연합 영성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대분열’, 1054
두 기독교회 사이에서는 대략 700년경부터 신학적인 의견차이가 계속 발생하였으며, 처음으로 심각한 갈등을 보인 사건은 아카키우스 분열로 484년부터 519년까지 계속되었다. 교황 펠릭스 3(재위 483-492)가 단성론 논쟁을 해결하려는 제노 황제(재위 474-475, 476-491)의 시도를 거부한 것이 원인이 됨.
이후 다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등을 빚은 것은 8세기의 성상 파괴 논쟁이 낳은 여파때눈이었다. 동방교회의 예배흠숭에 대한 표현 차이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음. 그 결과 서방의 많은 신학자들은 2차 니케아 공의회(787)가 우상 숭배를 조장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샤를마뉴 황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공의회를 소집했으며, 어떤 형태의 성상 공경이나 성상 흠숭도 거부했다. 신자들이 형상 앞에 무릎을 꿇거나 형상에 입맞추거나 그 앞에 촛불을 켜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동방교회는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관습을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임.
두 교회의 갈등은 동로마 황제가 평신도 신학자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함으로 발생한 사건인 포티우스 분열(재위 863-867)때 재차 격화되었다.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의 동의없이 필리오케(그리고 아들에게서도)라는 문구를 사도신경에 넣은 것도 한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1054년의 분열은 이전의 논쟁들보다 더 심각한 사안이었다. 성찬에 누룩없는 빵을 사용해하는가, 누룩있는 빵을 사용해하는가? 동방교회는 누룩있는 빵을 관습적으로 사용해왔고 서방교회는 누룩없는 빵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였다. 동방교회 입장에서는 점점 자신들을 자극하는 교황의 보편 권위 주장에 분개했으며, 서방교회가 영적, 정치적 권위를 내세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장에 합당한 무게를 부여하지않는다고 느꼈다.
십자군 원정때 서방군대는 이슬람의 무력 팽창을 저지하려고했지만 동방교회의 본거지인 콘스탄노폴리스의 점령과 약탈을 목표로 한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질문들???
 
1. 제국 형성의 힘의 논리나 민족의 이동으로 인한 제국의 몰락이 야만족들을 개종하게 하는 근거를 무엇이라 볼 수 있는가? 혹은 성경적 관점은 무엇인가?
 
2. 수도회 공동체 (베네딕트 수도회 공동체, 켈트족 선교기지) 와 정규 교회가 기독교 선교에서의 관점상의 차이점?
 
3. 신학적 논쟁/교리나 종교적 전통과 신조에서 오는 견해로 교회/공동체가 분열되어 다른 양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인가? 종교 제도권의 세력 다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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