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고: 하이-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이마고하이-르네상스와 매너리즘
2017. 11. 30()
Part 1.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
부제종교와 권력
참고문헌 신형준 2007 사회평론
시대적 배경
16세기 유럽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중요한 움직임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탈리아 와 스페인을 중심으로한 가톨릭개혁(반종교개혁)이다.
루터가 제기한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대한 비판 중 성인숭배와 성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성상파괴운동으로 이어진다이 운동은 주로 독일어권과 네덜란드에서 극렬하게 전개된다그러나 사실 루터 자신은 성상파괴를 무질서한 폭력적 불법행위로 간주하여 반대했다성상파괴운동의 이론적 정당화와 선동은 다른 설교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이에 맞서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상옹호론을 편다이들의 논리는 8세기 비잔틴제국의 전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20 년대 피렌체와 로마에서 르네상스의 절대 원칙을 벗어나는 새로운 움직임 즉 매너리즘 이라는 운동이 태동 그리고 캐돌릭교회의 전통과 성경 사건을 기반으로 미술을 규준과 전통에 맞추어 묘사할 것을 요구하는 하이-르네상스의 공존 하였다.
용어정리
하이 르네상스이탈리아에서 미켈린젤로레오나르도 다빈치라파엘로티치아노 등이 활약한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친 약 30년간의 절정기 르네상스 시기이며엄격한 형식에 준거한 예술적 활동을 요구했다실제의 하이 르네상스 자체라기보다는 매너리즘에 일탈적인 측면과 과도하게 과장되고 왜곡되고 장식하는 측면에 반대되는 금욕적이고 명증하고 이성적인 미술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신학자들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이해된 르네상스적인 이상주의자
매너리즘(기교주의) 깊은 공간감의 창출과 이상화된 인체 비례 재현을 버리고 다시 중세로 돌아간 듯한 밀폐된 공간과 기이한 인체비례 매우 자기적인 자세를 즐겨 사용규준과 전통에 벗어나 독자적 해석 과 르네상스의 특징인 절제와 수학적 엄정함을 벗어나 지나칠 정도의 장식성을 추구 16세기 전반기부터 태동되었다
대표적 매너리즘 화가파르미지아니노 와 브론지노
카돌릭이 당면한 문제와 대응
예수회는 약 4백년 동안 반개혁운동을 이끈 주도 세력으로서 교황의 권위를 세우고성사(聖事제도를 회복하며종교 개혁의 성경적인 원칙에 의해 영향을 받은 여러 나라들에게 미신적인 신비주의를 추진하는 일을 하였다.
볼로냐의 주교 가브리엘레 팔레오티(1522-1597)가 내세운 올바른 종교미술의 이론은 매너리즘에 대한 반박에서 출발했으며그는 미술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적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성 그레고리의 전통적인 성화옹호론에 주목하였고팔레오티는 그림 또한 일종의 만국공통(보편)어로 내면의 개념과 감정을 표출하는 언어라고 보았다바로 이런 보편성으로 인해 그림이 어떤 점에서는 신성을 닮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이런 고상한 미술이 온갖 난잡한 주제를 그려내면서 타락했다고 보고 있다.
1564년 교황 피우스 4세가 발표한 금서목록처럼 그림에 있어서도 금지된 주제목록을 교회가 발표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예를들면 논란여지착오적의심스럽고미신적이단적화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외경에서 나온 주제들...
하지만 카돌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용한 수태고지 장면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걸쳤던 천 등 승인되어왔다.
주제뿐 아니라 양식적인면에서도 매너리즘은 용납되지 않았다왜냐하면 매너리즘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왜곡시켜 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돌릭 개혁의 서막
16세기 전반기와 후반기 르세상스의 성격을 가르는 분수령은 1545년 교황 바울 3(1534-1549)가 소집한 트렌트 공회이다
트렌트 공의회와 함께 기치를 올린 카톨릭 개혁은 1555년에 등극하는 전직 종교재판 장 바울 4세 때에 더욱 전투적으로 추진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와 라파엘로(1483-1520)는 매너리즘이 등장하는 시기에 사망미켈란젤로(1475-1564)는 비교적 양식적으로 단일성을 보인 동시대 화가들에 비해 사실 하이르네상스 와 매너리즘의 모두 걸친 작품을 만들어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교회와 긴밀히 밀착된 최고 엘리트 미술가이며 16세기에 들어 수많운 교회의 재건장식업자 역할을 하였다.
시스틴 벽화가 완성되어가던 1542년경 미켈란젤로는 매우 종교적인 내용의 "그리스도의 은덕"라는 책을 통해 크게 감몀받았다이책은 베네딕토 수도사 폰타니니가 쓰고 인문학자인 플라미니오가 편집한 것으로 1542년경부터 이후 트렌트공회에서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책으로 인간의 구원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책이다카돌릭 내부의 변화 조짐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울 3세가 등극한 이래로 세상이 바뀌었음을 이미 알았다 바울 3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채플을 세우면서 프레스코 장식을 미켈란젤로에게 맡 겼다. 1542년에서 1550 년에 걸쳐 미켈란젤로는 절제된 르네상스형식에 맞춰 교황을 상징하는 성 베드로의 일화 <성 베드로의 순교>"와 새 교황의 영명 성인인 성 바울의 이야기 <바울의 개종>을 여기서 그렸다.
이 두 그림에서 미켈란젤로는 실험적 경향에서 르네상스적인 간결함과 보수성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카돌릭교회가 엄격한 보수주의로 돌아섰음을 미켈란젤로는 간파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그림 6 <성 베드로의 순교> - 과장된 근육뒤틀린 자세가 많이 줄어들고 공간적으로도 여우와 균형감이 있는 그림
그림 7 < 바울의 개종>- 절제된 르네상스로 회귀한 그림
그림 8 <최후의 심판> - 본격적인 카돌릭개혁이 시작되기 이전에 르네상스적 절제와 이상을 벗어나는 형태적 실험 작품
카돌릭 교회의 개혁(반종교개혁)
트렌트 공회와 카돌릭신학자들이 요구한 카돌릭개혁의 이상에 부합하는 미술은 한마디로 정확한 묘사질서 정연를 최고의 규준으로 삼았으며 내용면에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에서 인가받은 주제를 그려야하고 형식면에서 대체로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쪽을 강요하였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만큼 거물은 아니었으나 16세기 후반기에 카돌릭 개혁의 입장에서 선호되었던 르네상스적화가로 펠레그리노 티발디(1527-1596)와 페데리토 주카로(1540-1609)가 있다이 두 화가는 흔히 매너리스트로 분류되어왔으나 이들 작품중에도 르네상스양식으로 회귀한 작품이 눈에 띈다.
티발디는 1560년 이후에 성 카를로 보로메오와도 친분을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경건하고 올바른 미술을 만들어야한다는 보로메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1587년 티발디는 스페인왕 필립 2 (1527-1598)의 초청으로 스페인으로 건너가 에스코리알의 프레스코를 무려 46장면이나 그렸다주카로 역시 에스코리알의 장식을 위해 필립 2에게 초청받은 로마의 화가이다이렇게 에스코리알의 장식에 주카로와 티발디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이들의 그림이 매우 카돌릭적이라고 안정받았음을 시사한다.
티발디의 작품들그림 11 <만나를 주음>-그림의 인물들은 자세나 몸집에 전혀 무리가 없고 인체비례도 잘 맞아 자연스럽고 편안해보이는 르네상스적 그림
그림 12 <막달레나 앞에 나타난 예수>-에스코리알에 그려진 그림으로 매너리즘의 실험적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 그림
주카로의 작품들그림 10 <수태고지>- 에스코리알에 그린 이 그림은 당시 카돌릭개혁의 신학자들이 요구했던 질서와 조화를 갖추어 자세의 왜곡이나 뒤틀림이 전혀없는 균형잡히고 평온한 르네상스의 절제를 나타낸 그림
이탈리아(로마피렌체)의 미술이 베네치아동방 비잔틴북유럽과 스페인으로 의 연결과 발전
트렌트 공회 이후의 카돌릭 미술은 공의회 정의와는 달리 매우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양식 즉 바로크로 발전해나갔다그리고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미술이 카돌릭개혁이 원했던 미술의 기능 즉 신도들에게 카돌릭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감성적 도구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낸다이같은 격정의 바로크 미술은 이미 16세기부터 몇몇 화가들에게서 단초가 보였는데 이들중에 한편 교회의 요구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그림을 그리면서도 교회와 그의 군주들로부터 환영받은 화가 티치아노와 같은 하이-르네상스 화가도 있었고 일부 매너리스트도 있었다티치아노의 미술에는 르네상스를 넘어서는 어떤 요소들이 카돌릭개혁의 전투적 기상에 부합했다고 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강렬한 에너지는 엘 그레코를 통해 스페인에 알려지게되고 이후 카라바조의 그림과 함께 스페인 바로크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스페인 왕 필립 2세는 티치아노의 그림을 매우 선호했으며 에스코리알 장식에 이탈리아 화가들을 대거 초청하게 된것도 왕의 취향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찰세 5(스페인 왕 필립 2세의 아버지)의 기마 초상화를 그리기도하였다그리고 1548년 필립 2세의 초상화도 그렸고 이후 황실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이처럼 티치아노는 화가와 고객이라는 관계를 매우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권력의 최상층에 다가섰다.
이처럼 카돌릭 지배층을 중요한 수입원으로 삼고 활동했던 티치아노는 직감적으로 카돌릭교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의 미술언어를 비록 그것이 신학자들의 추상적인 강령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하더라도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미술을 제시함으로써 개혁기에 교회가 필요로하는 새로운 미술언어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티치아노 작품들:
그림 13 <페사로 마돈나> - 이작품은 베네치아의 교회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데이 프라리의 좌측 제단()에 그려넣은 것으로 관람자의 공간과 그림안의 공간을 시각적인 장치들로 연결시켜 관람자가 마치 그림안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같은 환영을 창출한다그림과 교회공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효과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바로 바로크 미술의 특성인 종합미술(Gesamtkust)적 효과가 보여지고 있다.
그림 14 <이삭의 희생> - 1542년 산토 스피리토 인 이솔라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견하는 일련의 구약 일화들을 그렸는데 이 그림도 공간확장기법을 사용하여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미술을 제시함으로써 개혁기의 교회가 필요로하는 새로운 미술 언어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림 15 <글로리아> - 실제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감성을 민감하게 의식했던 티치아노는 카돌릭 전통에서 양육된 사람들이 무엇에 의해 위안을 받고 무엇에 감동을 받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알아 그점을 바로 그림에 최대한 묘사함으로써 당시 로마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담한 구도와 양식으로 그의 고객이었던 카돌릭 상류층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또 놀라운 자연주의 화풍으로 주목받았던 다른 베네치아의 화가 파올로 베로네제(1528-1588)의 경우는 카돌릭 개혁의 시대 상황이 화가에게 반드시 우호적인 기회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해준다베네치아의 그림은 조바니 벨리니의 <성 프란시의 엑스터시>에서 보듯이 놀라운 자연주의 화풍을 르네상스의 기하학적 양식에 결합시켰던 것으로 유명하다얼핏 생각하기에 베로네제의 자연주의적 화풍은 정확한 묘사를 추구했던 카돌릭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을 것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베로네제의 작품들:
그림 16 <레비의 연회> - 이 그림의 원래 주제는 최후의 만찬이었다벨네제는 그림의 실감을 높이기 위해 자연주의적 방식과 화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림에 개게르만 용병들취객들코피 흘리는 사내광대복장을 하고 손목위에 앵무세를 들고 있는 사람이쑤시는 사도중 한사람 등 주제 외적인 잡스런 엑스트라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고 제목을 최후의 만찬에서 레비의 연회로 바꾸어야했다.
◾ 결론
카돌릭개혁기의 교회가 매너리즘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이에 반해 하이-르네상스의 일부 측면을 올바른 미술로 정의했다이런 경향으로 르네상스적인 양식으로 회귀한 화가들로 미켈란젤로티발디주카로가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카돌릭신학자들이 제시했던 올바른 성화의 정의는 실제로 화가들이 그림의 호소력과 감흥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과는 잘 들어맞지 않았으며올바른 신앙심을 고취시키려는 카돌릭개혁 정신을 정확하고 정통적인 방식으로는 보는 이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알고 화가 자신들만의 고유한 표현 언어를 찾아내었다바로 이 새로운 시각언어가 결국에는 카돌릭교회가 원했던 강력한 전도의 무기로 발전하게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16~17세기종교투쟁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미에 관한 것이 아니다이들이 말해주는 것은 천상의 구원을 향한 열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이다구원과 투쟁천상과 지상이라는 양극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공존하는 패러독스의 세계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바로크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당시의 세계이고 삶이다.”
Part 2. 틴토레토 와 엘 그레코
부제열정과 열락의 비전(환상)
도입부
매너리스트로 분류되는 화가들중에서 오히려 카돌릭개혁의 기상을 훌륭히 형상화해낸 두 화가 틴토렌토 와 엘 그레코를 중심으로 교회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매너리즘의 지적 자극과 형식적 실험주의의 미술을 소개한다.
이 두 화가는 매너리즘의 탈 르네상스적인 형식언어를 표현주의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카돌릭개혁의 신앙적 열정을 매우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결과적으로 이 들은 다음 세기의 바로크를 예견했기 때문에 이 두 화가의 미술이 매너리즘이라기보다는 원 바로크(Proto Baroque)라고 책저자는 피력하고 있다.
용어 정리
바로크 - 17세기 유럽의 미술건축음악그리고 문학 등을 아우르는 예술 양식바로크 미술은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는 것과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는데 그 균형이란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다루벤스와 렘브란트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
로코코 -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건축의 유행을 말한다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지적 현학과 형식적 실험주의로서의 매너리즘
화가의 가장 안정된 수입원이 교회였기 때문에 매너리스트들은 여전히 교회안에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화를 그렸다.
피렌체의 산타 펠리치타에 설치된 폰토르모(1494-1556)의 <십자가에서 내림>이 그런 예이다트렌트 공의회이후로는 매너리즘의 새로운 양식언어를 단순히 형식주의적 실험의 영역이 아니라 카돌릭개혁의 기상을 전달할 수 있는 호소력있는 도구로 해석한 작품들이 등장한다틴 토레토(1518-1594) 와 엘 그레코(1541-1614)가 바로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강렬한 에너지넘치는 동세(움직임)’, 이상적 인체비례와 이성적 공간감을 초월한 듯한 표현주의적 요소는 카돌릭개혁의 전투적 신앙심즉 이론적 담론의 차원을 뛰어넘는 타오르는 신앙의 열정을 매우 주정주의적으로 시각화해주고 있다이런 면에서 하이-르네상스의 주지주의(intellectualism)와는 극명히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매너리스트와 이후의 바로크화가들은 공격적 또는 광신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카돌릭의 영적 희열과 열정을 그림으로 형상화했지만 이것은 결코 트렌트 공회가 의도했던바가 아니었다오히려 트렌트 공회의 강령에 충실했던 미술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 베네치아의 화가 틴 토레토
16세기 후반 집중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마지막 작품은 1599년 완성되었으므로 16세기 미술사의 막을 닫으며 다음 세기를 열어 놓은 화가이기도하다.
틴 토레토의 작품들:
그림 29 <성 마르코의 기적죽은 성인이 지상의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도움과 가호의 실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틴토레토는 성 마르코가 건장한 육신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고통받는 노예를 향해 내려오는 모습을 그렸다눈을 찌르려던 꼬챙이도사지를 자르려던 망치와 도끼도 부서져 버린다.
프로방스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한 노예가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까지와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그곳에서 몸을 바치겠다고 서원했고 주인에게로 돌아간 이 노예를 아무리 고문과 형벌을 가하려해도 이 노예의 몸에 전혀 성처를 낼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크게 놀란 노예의 주인 역시 베네치아 성 마르코 성당 제단 앞에서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가 틴 토레토는 죽은 성인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노예를 보호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성인의 가호와 기적을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인의 강인한 몸으로 육화시켜 표현하였다.
매너리즘 요소왼쪽 얘기를 안고 젖혀진 몸과 목의 불편한 각도 표현
비 매너리즘적 요소구경꾼들이 파도처럼 줄을 이어가다가 망치와 부러진 못을 주인에게 들어보이고 있는 터번을 쓴 남자의 뒤틀린 상반신과 쭉 뻗은 두팔 과 하늘로부터 거꾸로 떨어지는 성 마르코의 동세
종교적 관평이 그림에서 보이는 카돌릭개혁요소는 단지 형식만이 아니고 전달하려는 그 내용 즉 죽은 성인이 살아있는 인간을 위해 중재할 수 있다는 교회 전통을 살려내고 있다.
그림 30 <최후의 만찬이 그림은 (Holiness)과 (secularity)을 절묘하게 하나로 조화시키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그림의 상단에는 천사들이 하단에는 인간과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그림의 전면에는 매우 풍속화적이고 지상적인 모티프들이그림의 안쪽에는 성찬식의 미스터리가 나타나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매너리즘 요소: (1) 왼쪽 앞에 두손으로 젊은 사도 옆에서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서있는 거지 모습과 그의 등과 어깨가 기이하게 굽은 것은 폰토르모를 연상시키는 인체상 (2) 오른쪽 두명의 남녀 하인이 음식을 나르고 있는데 서있는 남자하인의 지나칠 정도로 몸이 뒤로 젖혀진 콘트라포스트(S자형 모형)
최후의 만찬의 주인공인 예수는 뒤로 물러나 있고 거지고양이하인 등이 전편에 차지하여 매우 풍송화적인 면을 강조해보이는 듯하지만 틴토레토는 성찬식을 암시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역시 영적이고 환영적인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다그림의 천장에 보이는 투명한 천사들의 모습이 램프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모습은 매우 혁신적인 모티프이다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려는 듯한 동세가 여기서도 강렬하게 묘사되었다.
여기에서는 실제 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입에 떡을 넣어주는 카돌릭의 성만찬식 전통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성스러운 예수의 몸(축성된 빵)을 신도들의 더러운 손으로 만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카돌릭교회의 성찬식과 그것을 집례하는 사제의 권위는 이 그림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가를 받은 것임을 교육해주고 있다.
이 그림은 과 을 기가 막히게 하나의 그림으로 조화시키고 있다결국 카돌릭개혁의 미술과제도 긍극적으로는 이런 과 의 조화와 결합일 것이라고 책저자는 말하고 있다그림이라는 물질적 수단을 통해 마테리알이 우리의 정신을 성스러움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 됨을 보여주려고 한 것같다.
스페인에서 활약한 엘 그레코
스페인에서 카돌릭신앙과 그 미술은 가정 열정적으로(혹은 광신적으로꽃피웠으며신대륙의 개척과 함께 남미와 북미 일부로 건너간다.
엘 그레코의 본명은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러스그레타 섬 출신으로 이 지역에는 비잔틴 양식의 성상이 제작되고 있었으며 비잔틴 성화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1567년 베네치아로 건너와서 서유럽의 화풍을 보고 격렬함과 동세’, 에너지 넘치는 붓질 등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본다.
로마에서 스페인신부 루이스 데 카스티야를 만나 스페인 톨레도로 이주하게 되며 당시 필립 2는 에스코리알을 장식하기 위해 이탈리아 화가들을 끌어모으고 있던중 신부 루이스의 소개로 엘 그레코가 1580년에 에스코리알의 제단화 주문을 받게된다.
미술이 종교적 내용을 충실히 담아야한다는 하이-르네상스적 양식에도 불구하고 엘 그레코는 정확한 묘사에 대한 기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성 모리스의 순교>(1582)가 에스코리알Escorial 예배당에서 배척되고 필립 II세의 맘에 들지 않자 궁정을 위한 그림 작업을 그만두고 경건 그림에 전념했다.
엘 그레코가 톨레도에서 활약하게 된 데에는 앞서 언급한 루이스 데 카스티야 신부가 톨레도 대성당의 주교와의 관계에 기인한다이런 도시에서 엘 그레코가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은 그의 그림이 카돌릭교도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또한 톨레도 고객들은 카돌릭수호에 앞장섰던 엘리트 상류층과 고위성직자들이었던 것이다.
엘 그레코의 작품들:
그림 31 <성 모리스의 순교엘 그레코는 가장 중요한 순교의 장면을 그림의 포커스로 삼지 않았다그 대신에 성 모리스가 수하들과 함께 순교를 결의하는 장면을 화면의 전면에 내세웠다.
성 모리스(3세기 인물)는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중앙에서 살짝 오른편에 푸른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성 마리우스이고 그는 이교도들로부터 종교를 전향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결국 이를 거절하고 순교한 가톨릭 성인이다.
그림 32 <예수의 옷을 벗김예수 양옆 함께 못박힐 도둑들과의 대화예수의 오른쪽 갑옷입은 병사이 장면에 3명의 마리아 즉 어머니 마리아 와 두 자매 마리아의 등장도 정확한 묘사에 근거하지 않는다갑옷 입은 병사는 관객들의 시선을 중앙에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모으고 있다갑옷에 예수님이 입은 붉은 옷이 비쳐져 붉은 색 부분이 비쳐진다그는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코 15,39) 하고 고백한 백인대장이다.
매너리즘 요소등장 인물들의 몸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많은 인물들이 공간안에 압축되어 표현된 것.
책저자의 견해과장과 왜곡이 그림에 보이지만 양식의 인물들에 나타난 강렬한 주정주의이다예수의 눈을 보라물기가 어려있는 두 눈은 마치 환영을 보는 듯 엑스터시에 취해 있다이것은 이후 바로크시기 스페인 성인화에 계승되는 모티프로서 트렌트 공회가 뤈했던 명증한 주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림 33 < 목동들의 배례제단화우측 하단에서 우리를 향해 돌아보는 성 제롬은 우리를 미스터리의 순간으로 초대한다톨레도 주교 루이스 데 카스티야의 인척 디에도 무덤 제단화
이 그림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축성된 빵을 통해 현현한다고 믿으므로 그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아기예수는 완전히 벗은 몸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살아있는 몸이 신이 인간으로 육화했음을 증거함을 나타낸다흥미롭게도 빛은 천상에서 예수에게 내리비치는게 아니라 예수의 몸 자체에서 발광하고 있다마리아와 목동들의 환하게 비쳐지는 것은 빛이 근원이 예수임을 시사한다우측하단에 나타나는 성 제롬의 그림은 바로크적 요소의 핵심인데 그의 몸과 얼굴에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가 각인되어 있다또한 그는 몸을 돌려 우리쪽을 바라봄으로써 그림의 공간과 우리(관객)의 공간을 이어주고 있다이처럼 그림안의 사건이 프레임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뻗어나오고 그림 밖에 서있는 우리의 공간과 이어지는 효과와 암시는 이후 바로크에서 만개k는 공간확장기법이 적용되었다.
그림 34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천상과 지상을 잇는 바로 그 중간 지점에서 천사 미카엘이 무언가를 두팔로 안아서 위로 날려보내고 있다이는 오르가스 백작의 영혼이다이작품은 자연주의와 환영주위가 결합된 새로운 미술 양식을 보여준다.
내용은 일종의 기적적인 상황비전(환상)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하늘위에는 천상의 성중이 나타나고지상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반이 나타나서 친히 오르가스 백작의 시체를 매장해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립적인 두요소는 공존과 대비이다대체로 상반부는 천상의 세계로 환영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고 그 아래에는 매우 놀라운 자연주의 화풍이 등장한다.
신학적 고찰:
당시 종교개혁가들은 먼저 교회에 있는 마리아와 성인의 동상과 그림들을 파괴할 때이다엘 그레코가 있던 스페인에서는 종교개혁을 부르짓는 개혁가가 없었다우리와 그림사이에서 또는 우리와 예수사이에서 심리적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성 제롬의 모티프는 카돌릭개혁이 수호했던 교회의 전통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성인의 숭앙이다카돌릭신앙에서 성인들이 우리와 하느님사이에서 중간의 매개자가 되어준다는 믿음을 비유한듯하다이처럼 엘 그레코는 그림의 문턱에 성 제롬을 배치하여 공간의 연결과 확대라는 바로크적 효과를 냄으로써 카돌릭개혁의 믿음이었던 성인숭앙을 옹호하는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결론
틴토레토는 그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서 속의 공간에 성의 임재하는 그림을 그리고자했다. <성 마르코의 기적>에서는 아예 성이 단단한 육신으로 화하여 지상으로 돌진해 내려오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엘 그레코는 16세기후기로 가면서 점차 속(지상인간 등등)의 공간을 성(천상천사성삼위 신 등)의 공간으로 변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작품에서 성과 속은 공존하나 분리되어 묘사되었다성과 속천주와 인간이 구별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이성에 기반한 엄정한 신학의 종교를 가진다하지만 성과 속이 신과 인간이 결합될 때에 그래서 속이 성이되어버리고 인간이 신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들을 때 신비주의가 된다중세부터 많은 성인들은 신비주의 길을 통해 신을 경험했고 그들은 정교(바른교)와 이단의 경계에서 경탄과 의심을 동시에 받아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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