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캐리 선교사 이야기
윌리엄 캐리 선교사 이야기 (독후감 요약)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는 1761년 영국 노스햄프톤(northampton) 작은 마을인 폴러스페리에서 직조공인 애드문드 캐리 와 어머니 도로시에게서 가난한 가정의 다섯번째 이들로 태어났다. 다행히 여섯 살 때 영국 교국인 성 제임스 교회의 사무원이 된 아버지를 따라 이사한 곳에서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이었지만, 다행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책을 좋아했던 윌리엄은 책을 통해 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며 상상의 나래를 펴며 항해하는 상상을 하며 자랐다. 특히 외국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 사람은 캐나다에서 돌아온 피터 삼촌을 통해 보고 경험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게되었다.
어렸을 때 지적 호기심이 컸던 윌리엄은 언어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서 라틴어, 나중에는 헬라어, 히브리어까지 능통하게되었다. 열두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사무직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하고 박식했지만 밖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던 윌리엄은 시골의 드넓은 평원을 오고가며 농사의 일을 했지만 해빛 알러지로 얼마못되어 그만두고 클라크 니콜스 제화공의 도제로 일하게되었다. 여기서 윌리엄의 신앙을 바꾸게 될 친구 존 위르를 만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도제공으로 니콜스 밑에서 제화 도제를 배우며 온갖 잡일들을 맡아 일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도제공 시절 부츠 대금으로 받은 1 실링으로 깃털 펜을 사고 니콜스 제화공을 속이는 일로 당시 심각한 죄로 감옥에 갈뻔한 했는데 이 절박한 상황에서 윌리엄은 서원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저를 이 상황에서 구해주신다면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 매주일 세 번씩 예배에 참석하고 다시는 그 어떤 것도 훔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서인도로 끌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속인 것이 들통이 났지만 애원하는 윌리엄이 애처러워 용서해줘서 하마터면 범죄자가 되어 서인도로 끌려갈뻔한 평생에 잊지 못할 날이 되었던 경험이 나중에 선교회 재정 운영에도 정직성과 투명성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도제공으로 있을 때 토마스 존스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울 기회를 얻어 2년후에는 그리스어를 읽고 쓸 수 있는 그 마을에서 유식한 열여섯 청년으로 자랐다.
같이 도제로 일하던 존 위르는 당시 비국교회의 지도자 아들이었으며 두 사람은 교회예배방식, 유아세례, 성직자 임명 과 여러 신앙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며 논쟁을 벌였던 것이 나중에 결국 국교회는 영국 왕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미국의 독립혁명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존 위로의 제의를 받아들여 비국교회의 기도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이 나중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란 것을 알지 못한체 발을 들여놓게되었다.
비국교회모임에서 히브리서 13장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게하려고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는니라”의 말씀이 윌리엄의 마음에 비수같이 꽂혔다. 이제 존과 윌리엄은 믿음의 친구가 되어 일도하며 성경을 소리내어 읽으며 즐거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도제공인 니콜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도제일을 다 마치기전에 윌리엄은 해클톤이란 마을로 옮겨 플랏켓 목사가 운영하는 비국교회에 다니게되며 둘째 딸 도로시와 결혼을 하고 얼스 바턴이라는 마을과 폴러스페리의 비국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게되었다. 국교회 교회의 사무원 가족이 비국교회에 다닌다는 자체가 당시에는 창피한 일이고 혹시 아버지가 비국교모임에 나간 사실이 발각이라도 되면 해고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윌리엄의 부모는 결혼이후 서로 왕래가 없었다. 외롭고 혹독한 가난속에서 첫 딸 앤을 병으로 잃고 본인도 병으로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처하게되었다. 다행히 여러 도움을 받아 피팅톤에 작은 집을 구해 이사하게되었고 시간나는대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계속 공부하며 국교회와는 다른 신앙의 과정을 밟게되어 1783년 10월 5일 윌리엄 캐리는 노스햄튼사이어의 네엔강에서 침례를 받았는데 침례를 배푼 존 라일런드 목사는 교적부에 “오늘 가난한 제화공에게 침례를 줌”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먼 훗날 이 가난한 제화공이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릴만큼 위대한 선교사가 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윌리엄 캐리는 몰튼 지역의 작은 침례교회에 전임목사로 초빙되어 갔다. 목회중에 학교에서 부업으로 교사일의 하며 특히 지리를 가르치며 세계지도를 그려 세계 각 곳의 정보들을 적어 놓아 마치 항해사가 된 것처럼 이대륙에서 저대륙, 이섬에서 저 섬으로 설명해 나갈 때마다 윌리엄은 세계 여러나라들의 모든 이교도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이 끓어올랐다.
윌리엄 캐리는 1787년 5월 3일 정식으로 침례교회 목사 안수를 받으며 이제 노스햄턴 성직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 모임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세계선교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뒤없는 주제 넘은 열정이란 비판을 받을 만한 놀라운 주장을 피력한다. 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명령은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당연한 진술이지만 당시 교회는 열 두명의 사도와 제자들이 맡겨진 사명을 완수했다고 믿었다. 주제넘은 열정이라는 비판의 소리에 굴하지 않고 윌리엄은 더 진지하게 이 세계선교의 문제를 검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결국 한권의 책을 쓰게되었고 고우치라는 교인의 도움으로 구두를 만드는 대신 훌륭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며 책 집필을 게속해나갔다. 그 때마다 적시 적소에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여전히 가족 부양을 위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열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되었다. 자녀를 잃고 아내의 우울증같은 가정의 시련과 가족 부양이며 교회일이며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자신이 집필한 원고도 몇 번의 교정을 거쳐 마침내 87쪽 분량의 “세계 각 나라의 색다른 종교현황 속에 거하는 이교도들과 대화의 수단을 사용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에 관한 연구와 그 실용에 대한 고려”라는 해외선교 연구보고서를 출간하게된다. 이 책의 4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나라에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으며 선교사에게 예상되는 위험과 난관들을 설명하고, 외국을 여행할 때의 가장 좋은 경로와 이교도의 나라에 도착해서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남는법, 아울러 어떤 종류의 식품이 먹기에 안전하며, 어떻게 거주할 장소를 마련하고, 언어습득 등 자세하게 언급되었고 마지막장은 선교사로 파송되어 외국으로 가기위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문제도 언급하였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연구보고서였다. 다행히 책을 출간할 지원자인 톰 포츠가 출판비용을 부담하여 출간하게되었다. 책이 출간되고나서 침례교 목회자 모임에서 설교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위해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란 유명한 말로 설교를 마감한 이 말은 두고 두고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일깨워준다고 본다.
1792년 10월 2일 열 두명의 목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실제적인 선교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위리엄은 3명의 절친한 친구 목사를 얻게되어 “복음전도를 위한 특별 침례회”라는 단체를 만들게된다.
런던의 존 토마스 의사라는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아들게 된 윌리엄은 토마스를 선교회모임에 초대하여 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싶었다. 늦게 모임에 참석한 토마스와 윌리엄은 선교에 관련 이야기로 친구가 되었다. 선교에 온통 마음이 갔던 윌리엄은 토마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궁금증을 풀어나간다. 인도에서는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생계비가 얼마 정도인가? 토마스 의사는 인도의 뱅골어에 능통한가? 뱅골어가 어떤 모양의 문자인지 볼 수 있는 문서라도 있는가? 인도에는 영어를 알아듣는 인도인이 얼마나 되는가? 인도언어로 번역된 기독교 문서는 얼마나 되는가? 토마스 의사는 몇 명의 현지인을 개종시켰는가? 인도에서 흙이나 짚으로 된 오두막 한 채를 지으려면 얼마의 비용이 드는가? 윌리엄의 질문을 끝이없이 이어졌다. 토마스 의사가 전도한 브라만 출신의 인도인이 쓴 편지에 쓰인 글
“우리의 사정을 참작하시어 속히 전도자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번역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를 보고 윌리엄의 심장은 흥분으로 터져나갈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이제 윌리엄과 그의 친구 목사들은 결정의 시간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고 토마스 의사의 제안에 윌리엄 캐리는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만약 여러분이 제 뒤에서 든든히 받쳐만 주신다면... 제가 황금 어장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한목소리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자네를 지원하겠네, 죽는 그날까지!” 바로 이 순간 윌리엄 캐리의 남은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친구 목사들은 선교회의 위원이되어 끝까지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후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위대한 결정뒤에 따라오는 세상 염려들이 윌리엄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이해줄까? 아내 돌리는 뭐라고 할까? 지금 자신이 목회하는 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등등 이제 기도하며 풀어나가야 문제들이기도했다. 갈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윌리엄은 “하나님의 손에 맡깁시다.”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음은 아버지를 설득할 차례였다. 편지를 써서 인편에 보내고 난 후 돌아온 반응은 “영국에서 해야할 사명을 제쳐두고 도대체어디로 간다는 게냐?”, “아내하고 아이들은 어쩌고?”라며 극구 반대에 부딪혔다. 그 다음은 목회하는 교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처음엔 침울한 분위기였지만 이교도 국가에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기도해오던 교인들이었기에 교인들은 감사와 기쁨에 찬 반응을 보였다.
이제 인도로 출항하여 정착하는데 드는 비용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한가지 생각은 영국 전역을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며 선교 후원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교회들의 반응도 제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환영하며 선교 후원금을 지원하는가하면 1페니도 아까워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심지어 런던의 어느 침례교회는 후원을 원치 않았분만아니라 선교는 하나님의 몫일뿐 사람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하였다. 더구나 영국에도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은데 위험을 무릎쓰고 이교도의 나라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터무니없이 여겨졌다. 순회하며 영국을 돌아다니다가 헐이라는 지역에서 윌리엄 워드라는 인쇄공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훗날 인도로 와서 윌리엄 캐리와 함께 성경 번역 작업을 하게되어 인도의 선교 삼총사로 불리기도했다. 이같은 만남의 사건속에서 하나님은 앞서 일하시고 준비시키심을 당시에는 몰라도 그 후엔 깨닫게 됨을 보게된다. 선교 재정이 모아지긴 했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으로 항해 위험성과 인도에 도착해서도 동인도 회사에 의해 인도 입국이 선교사들에겐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상 입국 허가를 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불법 입국을 피할 길을 찾아보았지만 뚜렷한 방법이 보이지 않자 노예 선장에서 목사로 전향한 존 뉴톤 목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을 때 놀라운 확신을 얻게되었다. 존 뉴톤 목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허가를 받지 못한다면 당신이 인도에서 해야할 일이 없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시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에 보내기도 작정하셨다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당신을 막지 못할 것이오!” 마침내 온가족과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고 1793년 4월 4일 서른살의 나이에 선교사로서의 인생이 새롭게 펼쳐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입국이 불가능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놀랍게 인도에서 이교도를 향한 선교에 헌신할 사람들을 세우시고, 보내시고 그 일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탄할뿐이다.
선교 여정의 과정중에 만난 토마스 의사의 수상한 행동을 나중에 알게된 윌리엄은 큰 빚을 진 선교 동역자와 인도에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인도 생활의 경험이 있고 의술도 있고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는 친구이기도했다.
합법적으로 영국의 상선에 승선할 수 없었던 토마스와 윌리엄은 인도로 가는 외국 선박을 타면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고 덴마크 선박은 동인도 회사가 관활하는 도시가 아니라 덴마크 인들이 관할하는 세람포르이기에 안전한 입국이 가능해졌다. 잠시 늦춰진 출항으로 윌리엄은 돌리가 있는 피딩톤으로 가 다시 설득해 볼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가 설득하려했지만 거절에 거절을 거치다가 토마스 의사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 돌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만약 지금이 남편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된다면 평생 그 한을 어떻게 간직하고 살려고 그러십니까?” 결국엔 온가족과 돌리의 여동생 키티도 동행하게되었다. 또 문제는 온가족이 함께 떠남으로 인해 늘어난 식구들에 대한 승선비용이 증가되어 처음 예상했던 비용으로는 충당할 수 없게되었다. 4명의 어른과 4ᅟᅧᆼ의 아이들을 동반한 지금 총 뱃삯은 600파운드인데 350파운드밖에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돌리를 설득하여 인도에 가기로 결정했건만 이제와서 돈이 모자라 못간다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가 되겠는가? 윌리엄은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를 지금까지 도우셨고 돌리와 아이들까지 함께 가도록 해주셨으니, 인도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이제 방법은 하나 350파운드만 가지고 선박회사를 찾아가 흥정하는 수밖에 없다. 놀라운 역사로 8명의 승선표를 가지고 돌아온 토마스 의사의 발상은 윌리엄 온가족이 함께 여행하는데 자신 과 키티는 그 선교사의 하인이라고 둘러댄 것이 성공한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시고 성취시킴을 여기서도 보게된다.
이제 드디어 인도로 향하는 크론 프린세사 마리아호에 몸을 싣고 비치헤드의 깎아지른 듯한 하얀 절벽들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 모습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고국의 모습이 되었다. 본격적인 항해로에 접어들자 토마스 의사는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하여 윌리엄에게 인도의 각종 방언으로 쓰여진 자료들을 보여주며 성경의 창세기를 뱅골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가족, 토마스 의사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외에도 크리스마스 선장과 친해져 인도까지 가는 항해도면을 설명받기도했다. 어려서부터 쿡 선장의 탐험기를 읽으며 동경했던 일들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교의 그 이란이 아니라 어려서 꿈꾸며 동경해왔던 일들까지도 체험케하시는 자상한 분임을 이 긴 항해 과정중에 선장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게되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고 본다.
순항을 하던 배는 폭풍에 휘말렸다. 돛대가 부러져 나가고 항해 중에 폐렴으로 죽어간 배의 목수의 장례식을 배위에서 집도하며 지나온 항해를 생각하며 선교단체 앞으로 “... 추수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사방에 퍼져있으며 지금 이순간에도 이교도들은 온갖 우상 숭배와 미신, 무지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면서, 멸망을 피해 살길을 보여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란 편지를 써보냈다. 배가 아직 목적지인 벵골만에 도착하기전 일이다. 마침내 10월 덴마크 범선은 이제 목적지 세람포르까지 300km를 앞두고 벵골만에 도착하였다. 너무 늦게 출항하는 바람에 마지막 몬순 바람이 그치고 바로 순항할 수 없는 상황이되었다. 이제 지그재그로로 방향을 바꿔가며 길고 지루한 항법으로 나아갈 수 밖없는 상황이되었다. 뭐하나 순종롭게 진행되지않는 것을 볼 때 사탄은 어ᄄᅠᇂ게든 선교사 가족의 입국을 막아보려는 듯 방해를 놓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1793년 11월 9일 벵골만에 도착한지 한달만에 크론 프린세사 마리아호는 훌리강 어귀에 정박하여 수로 안내인을 기다리게되었다. 배가 정박하고 있는 동안 윌리엄의 머릿속에는 이제 다른 의문점들이 스쳐지나갔다. 어디에서 선교사역을 할 것인가부터 토마스 의사 가족까지 함께 살만한 집을 구할 수는 있을까? 만약 두명의 영국 선교사가 현지 인도인들에게 전도하다가 발각되면 동인도 회사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세람포르로 가는 도중에 동인도 회사의 검열을 어ᄄᅠᇂ게 통과할 수 있을까? 만약 신분이라도 탈로나면 선교는 고사하고 인도에서 바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피할 방도를 궁리해내야했다.
인도에 도착하는 모든 선박들은 승선인 명단과 함께 검열을 받고 보고해야한다. 이 상황에서 나처해진 윌리엄 가족과 두 사람 토마스와 키티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방도를 찾아야했다. 갑자기 윌리엄에 좋은 묘책이 떠올랐다. 그 해답은 바로 포고문안에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장은 ‘승선한’ 모든 선객을 보고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수로 안내인이 오기전에 배에서 내리면 내린 승객까지 보고할 의무는 없어진다. 선장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배에서 내려 윌리엄 일행은 인도인의 작은 나룻배에 옮겨타고 캘커타에 가서 선장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나 피할 길을 만들어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놀랍다. 이제 인도란 곳에 도착하니 한없이 벅차고 기뻤지만 한가지 맘속에 걸리는 것은 인도까지 온 이유가 토마스 부인처럼 하인들과 휘황찬란한 물건에 둘러쌓여 사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작은 마을 형성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다행히 토마스 의사가 인도에 머물때 개종시켰던 람 보슈라는 인도인 가정 언어 교사로 알게되어 인도인들 곁에서 소박한 삶을 살아갈 방도와 생계비 조달을 위한 노력을 해야했다. 가져온 철근과 모직물을 팔았지만 몇주 지나지 않아 재정이 바닥나고 말았다. 처음에 세웠던 계획들을 재조정하는 수밖에 없게되었다. 결국은 물가와 집세가 싼 반델이라는 지역으로 옮겨가 살기로 결정하고 윌리엄 일행은 세람포르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벵골어로 토마스 의사와 작은 배를 구입하여 강변 마을을 따라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은 믿고 재정을 맡았던 토마스 의사 1년치의 생활비를 한달만에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정원사 구직으로 형편이 좋아질듯했으나 이미 다른 사람이 그 일자리를 차지난후라 윌리엄 가족은 머물 집도 가진 돈도 별로 없는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었다. 거기에다 새로 옮긴 마니크툴라란 동네에서 아내와 아들 둘이 이질에 걸려 앓게되었다. 이 지경으로 만든 토마스 의사가 원망스러웠다. 그 즈음에 람 보슈 삼촌이 3년간 무료로 땅을 빌려주기로 했다는 소식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선교기지도 만들고 농사를 지어 살기로하고 토마스 의사에게 선교기금으로 맡겨놓은 기금을 찾으러 토마스 의사를 만났다. 토마스는 한점 미얀한 기색도없이 그 돈을 다 써버렸고 그뿐아니라 선교단체명으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돈을 빌려서 그것마져 사용하고 말았다. 게다가 호화로이 생활하게된 토마스는 더 이상 선교사역을 계속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윌리엄은 할 말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난 후 천천히 할말을 정리한 후에 선교본부에 편지를 썼다.
“토마스 의사는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항해 생활이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중략)나는 그분을 좋아하고 우리의 관계도 변함이 없지만 토마스 의사보다는 람 보슈가 선교사역에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구도 잃고 돈도 잃고 먹을 것마져 없는 빈궁에처한 윌리럼은 절망스러운 심경을 일기에 고스란히 적어내려갔다. 먹고 살아갈 방도를 찾아보았지만 되는 일이 없었다. 또 다시 최악의 상태에 빠져 절망하던 차에 토마스 의사가 대출받은 150루피를 주며 데차타로 갈 이사 비용을 받게된다. 광야로 내몰리는 듯한 삶은 아이들과 부인 그리고 키티에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되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선의 목적을 가지고 이교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윌리엄 일행에 이 고난의 시간들을 허락하는 것일까?
람 보슈 삼촌이 3년간 무료로 빌려주겠다는 땅은 정글과 같은 땅이었다. 하지만 이미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리고 음식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강건너 아담하게 지은 단층집에 누가 사는가 둘러보러 갔는데 의외로 윌리엄 쇼트라는 동인도 소속 회사원으로 온 사람이었다. 대화중에 윌리엄은 “하나님이 나를 이곳의 이교도들에게 가라고 하셨고 저는 제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합니다.”라고 강하게 힘주어 말하였지만 쇼트씨는 신앙이 없었기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머물 장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호의를 배풀어주었다.
사실 람보 슈 삼촌이 빌려준 마을은 들짐승이 나타나 물려죽었다는 소문이 퍼져있어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다고 전해들었다. 하지만 몇 주에 걸쳐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오두막을 짓고 살 준비를 해나갔다. 배를 타고 마을로 나가 전도하던 중에 너무 끔찍한 힌두교 의식을 보고 성경을 번역하여 배포해야겠다는 생각했다. 데차타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고대하던 선교사역이 문이 서서히 열리는 것 같았다.
윌리엄이 데차타로 옮기기전 캘커타에 머물때에 조지 우드니라는 동인도 소속 상업주재관이며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을 토마스 이사를 통해 소개받아 만나게되었다. 디나지푸어 상업주재관인 조지 우드니가 관리하던 염료공장에 감독과 운영을 의뢰받게된다. 더구나 그 제안은 윌리엄이 동인도 회사 소속으로 염료 공장 감독을 맡게되면 인도에 5년간 머무를 수 있는 합법적인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제의를 승낙하고 1794년 5월 23일 또다시 윌리엄 가족은 이사가는 날이었다. 배로 22일이나 걸리는 300여km나 떨어진 몰다로 가는 길은 여의치 않았지만 윌리엄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몰다에 도착해서 조지 우드니에게서 염료공장 운영에 대한 지도를 받았고 선교본부에 편지를 써서 선교 헌금을 보내지 말고 영국에서 선교사들을 더 모집하여 파송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몰다에서 2주간 조지 우드니의 집에 ㅁ무는 동안 기독교 모임에서 설교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하였다. 염료공장의 일과 토마스 의사와의 재회 시간을 통하여 다시 힘을 합쳐 벵골어 성경 번역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되었다. 선교 재정을 흥청망처 써버린 토마스 의사를 용서하고 다시금 성경 번역 사역에 매진하기로 했다. 이같은 관계속에 어려움에도 하나님은 용서와 화해를 통해 각자가 갖고 있는 재능을 활용하여 성경 번역이란 작업을 함께하도록 이끄셨다. 본격적으로 인디고 염료 식물을 벌목하여 제조 작업을 할 참이었는데 인도인 인부 몇 명이 칼리 신에게 드릴 제물을 가져왔으니 제사드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적인 싸움에 윌리엄은 물러서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주시고 돌보신다고 말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다음날 보니 염소를 바쳐 지낸 사실을 알게되었다. 한달 후 5살된 피터는 이질로 죽고 윌리엄이 말라리아에 걸리자 인도 인부는 칼리 여신의 보복을 받아 병에 걸렸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죽은 아들의 관을 만들어 묻으려했지만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은 죽은 백인 소년을 묻어주려하지 않았다. 카스트제도에 묶여 살아가는 인도인의 삶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병에서 회복된 후 윌리엄은 일기에 “사단이 인간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강력한 사슬이 카스트제도일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위안일 뿐이다.”라고 썼다. 가족의 어려움과 함께 영국 선교본부에 근 1년 2개월이 지났는데도 한통의 편지가 없었고 윌리엄은 전쟁터 홀로 남겨진 병사같은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당시 영국-프랑스간 전쟁으로 서로 보낸 편지가 제대로 배달되지 못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것들을 치심으로 또 우리가 의지하려는 어떤 기관의 지원을 떼어 냄으로써 철저한 외로움에서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해야함을 교훈해주고 있는 것같다.
선교본부에서 존 파운틴이라는 선교사를 보내온 것이다. 염료공장 감독의 보조인으로 일하게되면서 윌리엄은 더 많은 시간을 벵골어 성경 번역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되었다. 신실한 조지 우드니의 지원으로 중고 인쇄기를 구입하게되어 이제 본격적으로 인쇄할 준비를 기다리던 중에 선교본부로부터 두명의 파송된 선교사를 마중하기 위해 존 파운틴을 보냈는데 선교사는 천주교도로 잘못판정되어 첩자로 여김을 받게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두 사람 중 한 명만이 윌리엄 캐리와 합류하게되었다. 그 사람은 바로 6년전 순회선교 설교집회 때 만났던 젊은 인쇄공이었다. 선교회로부터 모두 8명이 왔다고 들었지만 오직 윌리엄 워드와 존 파운틴의 약혼녀 메리 티드만이 재회가 가능했다. 나머지는 네델란드영인 세람포르에 머물게되었다. 이미 키더포르로 가려고 많은 돈을 투자하고 집도 짓고 인쇄소도 완공된 상태였지만 선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들이 선교 정착과 더블어 인쇄공 윌리엄 워드가 그곳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윌리엄은 다시 새람포르로 옮기로 결정하였다. 훌리 강변에 위치한 넓은 부지에 저택이 있는 집을 구하고 이사하였다. 이제 이곳이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할 인도의 본부가 되는 것이다. 이곳에 모두 열명의 선교사와 아홉명의 자녀들이 같이 살게되었다. 그들은 선교사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여러차례 토론후 후원금 관리, 기독교학교 운영 수입 관리, 책판매금 등 공동기금을 마련하고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동역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인쇄 활자 맞추기, 자슈아 와 한나 부부의 기숙학교 운영, 위리엄과 존은 벵골어로 마을에 전도하러 다녔다. 바야흐로 모든 사역들이 제자리를 잡아가며 열매 맺혀가기 시작하였다. 세람포르로 옮긴후 키더포르로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얼마나 시기적절했는지 알게되었다. 때로는 눈으로 보기에 더욱 탐스러워보이는 것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려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앞서 행하시며 미래를 개척해감을 실감케한다. 손해보는 것같은 결정이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케된다.
성경책 인쇄가 성공을 거두어 인쇄사역에 필요한 재정이 충당될 즈음에 선교사들이 낸 광고를 본 영국 총독은 캘커다 이외의 지역에서는 인쇄기 사용을 금지했음에도 세람포르에서 영국인들이 인쇄소를 운영하여 출판한다는 얘기에 군목인 브라운 목사를 불러 선교사들을 찾아가 매듭지으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브라운 목사의 설득으로 동인도 회사를 비난하는 내용은 절대 인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총독의 화가 누그러뜨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윌리엄이 하는 사역에 호의적인 관심을 갖게되었다.
지난 7여년간 선교사역을 하였지만 인도인 개종은 한명도 없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개종자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때문에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때가 되었는지 세람포르에 사는 크리슈나 팔이라는 목수가 자녀들을 데리고 훌러강에 목욕하러 갔다가 미끄러져 어깨뼈가 어긋나는 일이 발생했는데 도움을 요청하러 선교사집에 갔을 때 마침 토마스 의사가 윌리엄의 집을 방문해 있을 때여서 목수의 어깨뼈를 다시 제자리에 맞추어주었다. 크리슈나 팔이 나무밑에 앉아서 통증을 완화시키고 있는 동안 토마스 의사가 복음을 전했는데 열심히 듣고 집에도 초대하고 그 목수의 집도 방문하며 알게되었다. 놀라운 일은 그날 저녁 크리슈나 팔이 자신의 친구인 고쿨이라는 사람과 함께 윌리엄이 사는 선교지에 찾아오게 되었다. 마침내 1800년 성탄절을 3일 앞둔 23일에 크리슈나 팔과 고쿨은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윌리엄으로서는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크리슈나 팔과 라쑤 그리고 맏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아내도 맏 딸도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동의을 얻었다. 나중에는 다른 딸들마져도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벵골지역에 처음 온 일곱명의 인도인 기독교인이 탄생하게되었다. 이 놀라운 일의 과정을 보며 현지 인도인이 어깨가 어긋나고 선교사의 도움 요청으로 의사의 손길을 받아 마을에서 쫏겨나다시피한 지경에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온 가족이 기독교로 개종시켜가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맡은 일에 충성되이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선교의 일을 담당하심을 알게된다.
1801년 3월 5일은 세람포르의 선교 기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잊지 못할 역사적인 사건의 날이었다. 이날은 벵골어 신약성경 전체가 한권의 책으로 출간된 날이다. 나중에 이 벵골어 신약 성경이 선교 기지를 구하는 은인이 되었다. 벵골어 신약성경이 출간되어 나오자 윌리엄은 그 동안 인쇄 사역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과 선교에 관심있는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책 한권씩을 보내주었다. 한권은 덴마크왕에게 보내어 세람포르에서 자신 등을 보호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했고, 영국의 조지 3세 국왕과 캘커타의 브라운 목사에게도 한권씩 보내주었다. 이즈음에 캘커타에도 새로운 변화조짐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영국 총독 웰레슬리 경은 인도로 오는 젊은 사무관들에게 도착한후 바로 업무를 맡기지 않고 2년간 대학교육을 받으며 인도의 문물을 접하게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대학 건립을 주문했다. 그리하여 1800년에 포트 윌리엄 단과대학이 문을 열었고 초대학장으로 브라운 목사가 추대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도어와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한 유럽인 교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벵골어 신약 성경을 출판한 윌리럼 캐리를 웰레스리경에게 추천하게된다. 당시 영국 국교회의 목사는 대학과정을 마쳐야했지만 침례교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일정한 자격이 갖추어지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교수 초빙에 부적격자임을 해명하러 브라운 목사만나러 캘커타로 왔을 때 이미 윌리엄 선교사만이 현지인들의 문화와 생활을 잘 이해하기에 벵골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칠 적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후 기도하며 포트 윌리엄 대학의 언어학부 교수 초빙에 수락하게된다. 이같은 교수직 승인은 너무나도 시기적절한 결정이었음이 나흘후 인 1801년 5월 8일 밤 비밀리에 영국 함대가 세마포르시를 장악하게되어 더 이상 거주허가를 덴마크 보호에서 받을 수 없게되었다. 교수직에 임용됨으로 합법적으로 윌리엄 가족들은 인도에 거주할 수 있게되었다. 6개월만에 영국-덴마크 전쟁이 끝이나자 세마포르시는 다시 덴마크 정부에 반환되어 선교사역은 더욱 확장되어갔다. 세마포르 선교기지에 오랫동안 남아있게된 윌리엄 워드, 조수아 마쉬맨, 윌리엄 캐리는 손발이 잘 맞았기에 유럽과 북미로까지 “세마포르의 삼총사”로 그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다고한다.
윌리엄 캐리는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알게된 사람들에게 종교적 의식인 “사티” 나 “소고”라는 풍습을 금지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기도했다. 윌리엄의 보고서를 면밀히 살펴본 총독은 1802년 유아살해 금지 법령을 공포했으나 사티 금지를 반대하는 힌두교인들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총독은 사티를 계속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종교의식이든 사회 풍습이든 그 사회 구성원에게 아품을 주고 복음전파에 장벽이되는 풍습을 제거하고자 윌리엄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 교회밖에서의 활동이 중요성를 보며 예수님도 성문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음을 기억하여야하리라(히13:12)
윌리엄은 두 번째 부인 샬롯트와 함께 수년동안 산스크리트 단어에 여러개의 아시아 언어로 뜻풀이한 다국어 사전 편찬준비를 해왔으며 이제 조판이 끝나고 세람포르에서 인쇄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사탄의 공격인지 인쇄소에 불이나 그동안 작업했던 다국어 사전 원고와 성경 번역 원고, 종교 서적 번역, 시크교와 텔루그어 문법책 원고, 엄청난 양의 인쇄용 용지 등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여 잃어버리는 시련을 당하게되었다.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서 착찹한 심경이었지만 이대로 눌러 앉을 수는 없었다. 힘을 내어 윌리엄은 비장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긴 하지만 이 일로 우리 모두가 주저 앉으면 안됩니다. 다시 분발해서 일어나고 그 와중에서도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시작해서 완성시키면 됩니다.”라고 권면했다. 선교사들이 빠른 시일안에 인쇄소를 복구하하는 것을 바라보던 인도인들이 내심 놀라며 짐을 싸들고 떠나버릴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화재 소식은 온 도시에 퍼졌고 이어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6개월후에는 영국까지 화재 소식이 전해져 그 소식을 들은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도와 인쇄소 복구를 위한 헌금을 아끼지 않았다. 이 화재로 인하여 윌리엄 캐리의 이름이 영국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윌리엄 캐리의 초상화를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엔 잿더미가 쌓여있지만 이일로 하나님은 윌리엄 캐리와 그의 선교 사역을 영국 전역에 알리고 선교의 부흥을 가져올 불씨에 기름을 붓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보게된다. 이 화재 사건으로 그동안 동인도 회사는 선교사들에게 공식적인 입국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인쇄소 화재를 계기로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동인도 회사의 선교사 입금 금지에 맞서 더 많은 선교사들을 인도에 파송해야한다고 역설했고 인도에서 선교사 입국을 제한하는 것은 노예제와 버금가는 국가적 범죄라고 역설했다. 영국의 모든 교회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1813년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구민 오십만명의 서명이 적힌 탄원서를의회에 제출하여 선교사들의 인도 입국 제한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의회는 탄원서에 대한 치열한 공방 끝에 과거 인도의 총독이었던 웰레슬리경에에 발언권주어 의견을 청취케하였다. 이 때 윌레슬리경은 세람포르 삼총사가 이룩한 선교 업적을 예로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다시 윌리엄 윌버포스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 공헌한 업적들을 열거하였다. 윌리엄이 한 번역 작업과 문화적 업적, 원예학과 농학으로 인도 사회 발전에 기여한 사실등을 차근 차근 설명해나갔다. 마침내 윌리엄 윌버포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1813년 6월 28일 동인도회사의 규정이 수정되었다. 마침내 선교사들에게 인도를 오고가는 자유로운 항해길이 열리게되었다. 여기서도 선교사들이 현장에서 벌리는 사역의 일이 전도만이 아니라 번역, 언어교육, 농업, 원예, 종교서적 번역, 인쇄기술 등 그 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실행함으로써 자유로운 선교의 길을 열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헌신이 필요함을 알게된다.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인도에서의 사역은 이제 공식적으로 동인도회사 총독으로부터 몰라칸 섬에 선교사를 파송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 열아홉 살이된 윌리엄 아들이 자원하여 안수르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이 파송식에 참여학 위해 멀리 미야마에 파송되었던 큰 아들 펠릭스와 식구들이 시간을 내어 세람포르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충랑을 만나 아내와 두 자여를 잃어버리는 참사를 당하게된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 선교사들과의 마찰과 오랫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한마음이 되어 일하던 윌리엄 캐리, 조수아 마쉬맨, 윌리엄 어드는 세람포르에서 진행되는 거의 모든 안건마다 이 신입 선교사들이 반대에 부딪혔다. 1817년 8월 윌리엄 피어스 부부가 세람포르에 도착함으로써 장기선교사와 신입 선교사들간에 이어졌단 불편한 관계에 마침내 깨어졌다. 1817년 말에 모든 신입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세람포르를 떠나 캘커타에서 20km 떨어진 지역에 새로운 선교기지를 세워 세람포르의 사역을 복사판처럼 운영하기시작했다. 그런데 세람포르선교회가 캘커타 지역에 선교기지가 구축되어 있고 인도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힌두교들에게 열성적으로 전도하는 상황에서 또 다시 동일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자원과 노력의 낭비뿐이었다. 선교사들간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관리들은 그들이 부임 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윌리엄 캐리로서는 미묘한 입장에 처하게되었다. 고위직 관리로부터는 그 어느 때보다 인정과 격려를 받는 반면, 새로온 젊은 신입 선교사들로부터는 철저하게 무시달했다. 지금까지 윌리엄이 당해 온 어떤 고통보다도 그것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아품이되었다. 심지어 선교기금으로 개인적인 재산을 축적한다는 비난은 견디기 어렸다. 지난 24년간 윌리엄은 자신의 재산뿐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재능과 시간을 아낌없이 바쳐왔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영국 선교회 위원들은 그러한 노력과 사실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듯했다.
그동안 세람포르의 선교사역을 예의주시하던 덴마크 국왕이 세람포르 선교회 부근 6천평의 부지를 기증해줬다. 이어 헤이스팅스 총독이 대학의 후원자자 되기로하고 건물 건축비로 125파운드를 기부했다. 또 영국정부는 의학교수들의 급여를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영국을 방문하고 돌라온 윌리엄 워드는 미국과 영국 기독교인들로부터 받은 5천파운드의 헌금을 내놓았다. 비록 침례선교회는 대학 설립을 반대했지만 많은 침례교회들이 개별적으로 헌금에 동참해주었다. 이렇게 세람포레 대학이 설립이되어 영적지도자들과 복음전파자들을 양성하는 기틀이되어졌다.
캐리는 1834년 73세의 나이로 사랑했던 인도 땅에 묻혔다. 윌리엄 캐리의 그칠줄 모르는 그 뜨거운 열정과 끈진길 도전과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덕분에 18세기 타락한 영국을 구하는 돌파구가 되었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던 대영제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19세기 선교 황금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참고도서
도서명: 윌리엄 캐리 내가 가겠소! , 자넷 & 제프 벤지 지음(안정임 옮김), 예수전도단, 2009년 1판 10-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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