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침례교회사

 세계침례교회사(요약)


침례교 기원에 관해서는 몇가지 학설이 주장되어 왔는데 "전승설, "아나뱁티스트 영현설,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 이라고 미국의 북침례교의 대표적인 역사신학자인 Robert G. Torbet는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남침례교회의 대표적인 침례교회사 역사가인 H. Leon Mcbeth 교수는 ‘영국 분리주의 파생설’, ‘성서적 아나뱁티즘의 영향설’ 성서적 교훈의 계속설‘, ’조직화된 침례교회의 전승설‘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통설은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인데,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와 스튜어트 왕조시대에 부패하고 타락한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신자들로부터 침례교회가 기원했다고 하는 주장에 따른다. 이는 1609년에 영국의 분리주의자 John Smyth와 영국인 피난민들에 의해 화란 땅 암스테르담에서 일반침례교회가 그리고 1638년 경에 대륙의 칼빈주의에 기초하여 런던 근교 사우스워크에서 John Spilsbury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특수침례교회가 세워짐으로 비로서 침례교회는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스위스 형제단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뱁티즘을 베풀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 혹은 ‘신자의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침례교회의 하나의 큰 물줄기 가운데 한 지류라는 점에서 대륙의 아나뱁티즘과 신앙적인 관련성은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강조했던 ‘모인’ 교회, 신자의 뱁티즘,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도의 삶, 양심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의 신앙원리는 침례교회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신앙원리이다. 그러나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하여 근원적인 뿌리를 찾고자 할 때는 역사적인 연결고리가 확실한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에서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일반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분리주의자들의 Gainsborough 교회, 특수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또 다른 분리주의자들의  제이엘제이교회(JLJ교회), 이들로부터 분열되 나온 성도들이 ‘신자의 뱁티즘’과 ‘회중정치’ 원리를 중심으로 이룩한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침례교회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16세기에 진행되었던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 권위가 실추되면서 상대적으로 각 나라의 왕권이 강화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제임스 1세에 의해 절대 왕정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기 때문에 자연히 영국 국교회 이외의 분파들은 정죄를 받았으며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중도노선(Via Media)을 취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두 개의 파가 나타났는데 하나는 영국 국교회를 인정하면서 개혁을 부르짖는 온건파(청교도들, 퓨리탄)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 국교회는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려면 분리 독립하여 교회를 세워야한다는 급집주의자(분리주의자들)이었다.
침례교회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피난갔던 존 스마이드와 그 추종자들은 1609년 암스테르담에서 신자의 뱁티즘에 의한 교회를 최초로 창립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 토마스 헬위즈와 그 추종자들은 1611년 혹은 1612년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런던의 스피탈필드 지역에서 새롭게 침례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638년에 존 스필즈버리 등은 대륙의 칼빈주의 구원관에 입각하여 런던 남쪽 서덕(southwark)에서 또 다른 침례교회를 창립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계 후손 없이 죽자 왕위 계승에 어려움이 생겼다. 결국 헨리 7세(1485-1509)의 증손자이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5촌 조카뻘이 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를 영국 왕으로 제임스 1세로 추대되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왕이 영국 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여러 기독교 분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데 영국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견고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던 제임스 1세로서는 기존의 종교 권력인 영국 국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신교 계통의 종교지도자들이 영국 국교회 이외의 타 종파들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는 ‘1,000인의 탄원서’를 왕에게 올리기도 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만이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하고 다른 분파는 이단시하면서 핍박하였다. 1625년 제인스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찰스 1세가 즉위했으나  의회와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특히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의회의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이제는 정치의 중심이 의회로 옮겨지게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개신교도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침례교회도 이 시기에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체제와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싫증을 느끼며 왕정으로의 복귀를 희망하였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왕정 복고(1660년)이다. 은둔 중에 있던 찰스 2세는 1660년 영국인들의 환호 속에 귀국하여 왕좌에 앉게 되었다. 찰스 2세 복귀 후 영국 의회에 영국 국교도들이 많이 진출하여 영국 국교회 이외의 다른 분파들에 대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1661년 이후 일련의 종교법령을 만들어 다른 분파 종교를 탄압하였다. 찰스 2세 통치 동안에는 영국 국교회 이외의 기독교적 종교활동이 왕명과 영국 국법에 저촉을 받는 범죄 행위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1685-1688)가 왕위에 즉위하여 영국을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회귀하려고 하였다.  제임스 2세의 친 가톨릭 정책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영국 국교회와 그 지도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윌리암 3세는 1688년 ‘권리장전’을 승인하였다. 영국 왕은 영국 국교회의 신자이어야 하며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을 못 박았다. 그리고 1689년 용인법에 서명함으로써 영국 국교회 이외의 타 교도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초창기 침례교 지도자들 가운데 존 스마이드(1570-1612)는 침례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1609년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을 이끌고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텔르담으로 이주해 갔다가 그 곳에서 침례교회를 창립한 인물인데, 존 스마이드가  그 후에 자신이 창립한 최초의 침례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본연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고, 세속정치인이 영적 공동체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과감하게 반대하는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다.
토마스 헬위즈는 스마이드를 추종하는 게인즈보로 성도들 가운데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였고,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순례를 위해 제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결국 헬위즈는 침례교회를 떠나 메노나이트와 합치려는 스마이드와 대다수의 성도들을 징계 처분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그리고 헬위즈는  지도자인 존 스마이드와 결별하고 1611년 혹은 1612년에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들을 이끌고 영국 땅으로 다시 돌아와 런던 테임즈 강 북쪽에 위치한 스피탈필드 지역에서 게속해서 모임을 가졌다. 이렇게 하여 영국 땅에 최초의 침례교회가 토마스 헬위즈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교회의 개념에 있어서 헬위즈는 당시 영국 국교회나 대륙의 관료적 종교개혁가들의 교회와는 구별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교회란 ‘기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적인 동동체였다. 그의 주장은 영적인 왕국은 세속적인 무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권력의 도움을 입고자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영적인 무기를 결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려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국교회의 교인으로 성장한 로저 윌리엄즈는  넓은 의미에서 영국과 영국의 국교회를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청교도주의를 넘어선’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당대의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와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신약성서와 당시의 영국 국교회의 현실 사이에 큰 괴리를 발견한 그는 더 성경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고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탐독하며 연구하였다. 그는 신약성서에 비추어 볼 때 영국 국교회는 거짓교회요, 참 그리스도인 이라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630년에 신대륙으로부터 목회 초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하고 아내와 함께 1631년 2월 5일에 보스턴 항에 당도하였다.  교회가 청교도들의 공동체이긴 했지만 윌리암즈 자신의 신앙과 비교할 때 충분히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의 명령에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는 1631년 4월 12일에 보스턴 북쪽의 근교인 Salem 교회의 담임목사로 세워졌다. 그 교회는 투철한 분리주의 사상을 가진 목회자를 환영하였다. 보스턴 시 당국은 그러한 목회자를 청빙한 Salem교회에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윌리암즈는 그 해 여름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1633년에 Salem 교회를 다시 담임하면서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인 민주주의 사상을 가다듬는 기회로 삼았다.
    
1635년 10월 윌리암즈는 보스턴 법정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고 평소에 주장해왔던 내용에 대해 해명하는 설명하였지만 보스턴 법정은 이러한 이단자가 메사추세츠만 식민정부에 거주하는 자체를 금하는 명령을 내려 추방하였다.  윌리암즈와 약 20여명의 추종자들이 함께 남쪽 광야로 도망을 쳤던 것이다. 그들은 겨울에 추방되어 동상과 죽음의 위기에 있었지만, 윌리암즈가 사귀어 놓았던 인디언들이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주었다. Providence 지방에 정착한 윌리암즈와 혹한의 ‘도망’에 동참했던 추종자들은 아직 영국으로부터 새로운 식민주의 개척을 허락받기도 전, 1636년 6월 16일에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1639년 3월 16일에 신대륙에서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로저 윌리암즈는 Catherine Scott이란 여인의 인도를 받아 신앙고백을 하였고, 평신도 지도자 Ezekiel Holliman으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며, 곧 이어 윌리암즈는 Holliman과 추종자들에게 역시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교회는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뱁티즘 베푸는 것을 거부했으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지는 원리에 따라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침례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그는 메사추세츠만 식민정부와는 다르게 Rhode Island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최초의 주가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성취하였다.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례교회는 미국 내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단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영국에 대항한 독립전쟁에서 침례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새 공화국 건설에 공헌함으로써 사회적으로도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말미암아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교회가 침례교회였다. 영적인 부흥과 함께 교인수와 교회수가 급증하였다. 그리하여 1814년에는 침례교회들이 미국 내에서 처음으로 전국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반선교총회는 10번의 총회를 가진 후 1845년에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는 비극을 맞았다.  이같은 침례교회의 남북 분열의 이유를 근원적으로 고찰해보면 미국 남부와 북부지방 간의 현격한 문화적인 차이에 기인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 외에 침례교 최초의 전국총회였던 일반선교총회가 내부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들도 있었다. 분열의 간접적인 원인으로써는 총회 조직에 대한 기본 개념의 차이와 국내 선교에 있어서의 불평등한 차별 대우를 들고 있다. 즉, 남부에서는 지역교회들이 기본단위가 되어 총회를 구성하고 총회가 국내, 해외, 신학교육, 출판문서 등 모든 목회 및 선교사역을 중앙집권적으로 관장하는 것을 선호하는 반면에 북부에서는 지역교회의 자치성과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목회 및 선교사역이 각 사역의 주체 기관들에 의해 주관되어 지고 개인이나 단체들이 자원하여 헌금하고 참여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전자는 총회체제를 후자는 협회체제를 주장하였다. 게다가 총회지도부를 북부지역 지도자들이 협의체제로 전환시켜 북부지역 선교사 우대,  북쪽 개척교회 지원 등 차별 대우가  남부 침례교인들에게 불만과 분노를 낳게 되었는데, 이것이 분열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침례교 분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그 당시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던 노예문제였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시기적으로 약간씩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830년 이전에는 단지 경제적인 체제로 이해되었고, 1830-40년의 도덕적인 개혁의 시대에는 도덕적인 문제로 대두되었고, 그리고 1840년 이후에는 정치적인 양상을 띠게 되면서 결국에는 남북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1833년에 영국 의회는 1838년까지 영연방에 속한 모든 나라에서는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때 그 법안 제정을 위해서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영국 침례교 지도자들이었다.  노예 폐지운동이 결실을 얻기 위해서 먼저 단체 구성과 단체 행동이 요구되어 미국 침례교 노예제도 반대총회를 구성함으로써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본격화하였다. 
노예 문제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여 남부 지역의 침례교회들이 일반선교총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는데, 새로운 총회 구성을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지도력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침례교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 탄생의 산파역을 맡았던 사람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총회장 직분을 보유하고 있었던 윌리암 존슨(1782-1862)이었다.  버지니아 침례교 선교협회가 제안했던 대로 1845년 5월 8일, 새로운 총회의 발기 모임을 위해 남부교회의 침례교 지도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 등 239명의 사신들이 Augusta에 모여 들었다. 발기 총회는 새로운 총회의 헌장 전문과 헌장 내용을 작성하도록 위임하기 위해 16명의 헌장 기초 소위원회 위원을 선출하였다. 헌장 기초 소위원회는 존슨이 작성해 온 초안을 검토하여 토의하였고, 약간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후 새 헌장을 작성하였다.
남부지역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던 윌리암 존슨은 새로운 침례교총회를 ‘총회 체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모든 지역 교회들이 한 총회 산하에 회원 교회로써 상호 협력함으로써 목회 및 선교사역에 능률성을 높이도록 하였다. 발기 총회의 제3일째날인 5월 10일 토요일 오전에 헌장 기초 소위원회가 제출한 전문 13개조의 헌장이 총회를 통과됨으로써 남침례교 총회는 정식 출범을 하였다. 북부 지역 침례교회들은 개교회가 총회 조직으로 인하여 속박을 받는 것을 매우 예민하였던 반면  남부지역 침례교회들은 개교회가 독립성과 자치성에 약간의 제약이 있다 하더라도 종합적인 차원에서 사역을 주관하게 하여, 수많은 지역 교회들의 에너지를 능률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남침례교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침례교인들은 근본적으로 기구화된 조직과 그 조직에 대한 강요된 순종을 매우 싫어하며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만나는 체험의 신앙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침례교인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지만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체험을 침례를 통해 고백함으로써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침례교인들은 개인과 개교회의 자유를 사랑하고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회중정치체제, 다양성과 융통성등을 존중하기 때문에 조직의 결성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찍부터 침례교회 지도자들은 개교회의 자치권과 독립성을 보장받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다른 침례교회들과 연합하고 협동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해 왔다.  자유와 협동 서로 상반된 두 가치를 어떻게 하면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침례교인들의 고민이요 갈등이었다.
초기 영국의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는 개교회와 지방회 혹은 총회와의 관계에 관하여 그 견해를 뚜렷이 달리하였다. 일반침례교회는 지방회나 총회의 권위를 개교회의 자치권보다 위에 두는 것에 별 이의가 없었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과 교회들 간의 연합사역을 위해서라면 개교회의 자치권이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양보하는데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특수침례교회는 개교회의 자치권이 침해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지방회나 총회는 어디까지나 교회 상호간의 교제를 위한 조직일 뿐 그것이 개교회 위에 군림하는 상부기관이 되는 것을 조심스럽게 경계하였다.  주의 만찬, 침례, 안수, 징계 등의 예식 등과 같은 교회적 기능은 오직 개교회의 목회사역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침례교회에서 ‘해외선교’를 위하여 본격적인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1792년 윌리암 케리와 앤드류 풀러에 의해 창립된 침례교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BMS)이다. 윌리암 케리는 1792년 5월에 Northampton 지방회 석상에서 이사야 54장 2-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이란 설교로 목회자들에게 이방인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10월에는 캐터링(Kettering)에서 있었던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해외선교의 시급함을 강조했지만 지방회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였다. 그래서 윌리암 케리와 앤드류 풀러는 자신들이 속해 있던 지방회나 총회를 의존하기를 포기하고 해외선교를 위한 독자적인 선교단체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침례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총회나 총회에 속한 교회들에 의해 해외선교가 주도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개종에 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도와 헌금에 의해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윌리암 케리의 인도선교 개척사역과 침례교선교회의 헌신적인 활동은 영국교회뿐만 아니라  독립을 이룬 미국의 교회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과 도전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제2차 대각성운동을 거치면서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영적인 갱신을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제2차 대각성운동의 결과의  두드러진 현상은 각 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전국적인 교단을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각종 기독교 단체들을 탄생시켰다.
미국 최초의 초교파적 해외선교단체인 미국해외선교위원회가 1810년에 구성되었다. 이 기관에 의해 첫 번째 해외선교사로 파송된 사람들은 Adoniram Judson 부부였다. 이들은 미국을 떠날 때는 회중교도였으나 선교지 버마를 향하던 배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유아세례가 성서적이지 못함과 신약성서는 신자의 침례와 침수침례를 가르키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버마에 도착한 후 윌리암 케리의 제자요 동역자인 윌리암 와드에게 침례를 받았다.
미국에서 최초의 전국적인 침례교 총회가 구성된 것은 1814년이었다. 윌리암 케리의 간절한 호소도 있었지만 회중교회 선교사로 버마에 아도니람 저드슨과 같이 파송 받았던 루터 라이스(Luther Rice)와 뜻을 같이 하는 침례교 지도자들은 의기투합하여 협의체제 조직 형태인 해외선교를 위한 일반선교총회의 결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1814년 5월 18일, 33명의 침례교 대표들이 필라델피아 제일침례교회에서 역사적인 첫 모임을 가졌다.
남침례교총회의 전체적인 윤곽은 총회체제를 구축하였으나 여전히 협회체제적인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다. 총회를 매 3년마다 개최키로 한 것이라든지 총회가 열리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총회 사무를 관장할 상설 집행기관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라든지 해외선교부와 국내선교부, 두 기관의 본부를 각각 다른 도시에 두게 한 것 등은 일반선교총회의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초창기 남침례교 총회의 활동은 총회적 차원의 협동 운동에 미온적이었다. 지계석주의 운동, 극단적인 칼빈주의, 과도한 개인주의 등 몇몇 반대 세력과 총회적인 차원에서의 협력을 전제한 선교운동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조가 팽배해 있었지만, 남침례교 지도자들은  선교와 구제활동을 위해서 범교단적인 협동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은 중국 본토 선교사로 활동중인 로티 문(Lotte Moon) 선교사를 돕기 위한 선교헌금 캠페인이다.
남침례교총회의 조직개편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던 것은 1917년에 총회 직속의 실행위원회의 발족이었다. 그 때까지 총회는 연차총회가 개최되는 몇칠 동안만 존속할 뿐이었다. 따라서 별도의 총회 사무실이나 상주하는 직원이 필요치 않았다. 이제 실행위원회는 연중무휴로 총회전체의 사역을 보살피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총회의 예산, 예산배정, 정책수립, 등 남침례교총회의 최고 집행기관으로써의 권위를 갖게되었다.
1925년 테네시 주 멤피스 총회는 남침례교 역사에 있어서 두 가지 결정을 낳은 획기적인 연차총회였다. 첫째는, 당시의 침례교인들의 신앙을 요약 정리한 남침례교 최초의 신앙고백의 채택이었다. 둘째는, 협동 프로그램의 출발이었다. 대의원들은 미래 프로그램위원회 보고와 동의안에 대해 수정없이 원안대로 가결하였다. 총회는 이것을 “남침례교인들의 협동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하기로 결정하였다. 협동 프로그램은 개교회나 소수의 몇 개 교회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선교, 교회개척, 신학교육, 대량난민구제 등의 대규모 사역을 전체 침례교회들의 결집된 힘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협동 프로그램의 최대의 매력이다.
    
1845년 5월 조지아 주 어거스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을 당시 남침례교 교회 수는 4,126개 였으며 교인 수는 351,951명이었다. 그 후 약 150년 동안 남침례교는 미국의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 기적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단일교단으로써는 세계 최대 교단이 되었다. 1992년 2월 12일 Baptist Standard지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 수는 38,221개, 교인 수는 15,238,283명으로 집계되었다. 국내적으로는 37개의 주총회와 1,218개의 지방회가 있고, 국외적으로는 약 116개국에 약 3,800여 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다.
남침례교 총회 실행위원회는 지난 150년 동안의 남침례교의 역사를 반성하고 방만한 조직으로 말미암은 낭비와 비능률은 없는지를 성찰하여, 서기 2,000년 새로운 세기를 보다 능률적인 체제로 맞이해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휴스턴 총회에서 “프로그램과 조직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21세기를 대비하는 혁명적인 체제정비 계획을 동 위원회에 위임하였다. 1995년 2월 이 조직 개편안은 총회 실행위원회에서 절대 다수로 채택되었고, 같은 해 아틀란타 남침례교 총회에서 1차 인준을 받았다. 이 개편안은 1996년 뉴 올리안즈 총회에서 두 번째 인준을 받아 채택되었으며, 약 3년의 준비와 조정의 과정을 거친 후 2,000년부터 조직 개편 효력이 발휘되었다.
세계선교사역은 지금까지 해외선교부의 명칭이 “국제선교부”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까지 미국이 중심이 되어 해외선교를 주도해 왔는데, 이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선교현장과 동족그룹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국내선교부를 “북미선교부”로 바꾸고, 지리적으로 가까이 인접해 있고 언어와 습관 생활방식이 유사한 캐나다 지역의 선교는 미국 내의 선교와 함께 북미선교부에서 관장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침례교회의 기원과 영국 침례교 지도자들의 종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 로저 윌리암즈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그의 투쟁과 기여, 미국 남침례교 총회의 형성과정, 협동 프로그램의 기원과 발전, 21세기를 대비한 남침례교 총회의 조직개편등을 통해 침례교회가 신앙적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자유’와 이를 이루어 가는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도서명 : 김승진 지음, "침례교회와 역사",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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