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침례교회사
한국침례교회사 (요약)
제1장: 한국침례교회의 시작(1889-1905)
이 시기를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물결을 타고 한국침례교회가 초라하게 뿌리를 내리던 시기로 보고 있다.
제2장:대한기독교회(1906-1949)
이 시기는 복음 전파의 일념으로 열악한 환경과 험악한 핍박과 박해 속에서 주님의 지상 명령을 승계함으로 침례교회의 정신을 생산해낸 시기로 보고 있다
제3장:대한 기독교침례회 시대(1949-1968)
이 기간은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준 정신적 유산위에 침례교 즉 신약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골격과 체계화를 통해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사역을 확장한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이 책은 위에서처럼 역사 구분을 3개의 장으로 대별하여 나누어 설명하고 있고 각 장별로 세분화하여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역과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침례교회의 태동은 1889년에 입국한 캐나다 독립 선교사인 말콤 펜윅(Malcom C. Fenwick)에 의해 서울과 황해도 소래에서 10개월 머문후 본격적인 1891년 함경남도 원산에 정착한후 사역이 확대되자 1901년 “대한 기독교회”을 조직하여 사역 활동을 시작하였다고한다.
∎제1장 한국침례교회의 시작(1889-1905)
말콤 펜익 선교사의 내한과 소래와 원산 정착, 엘라 싱 기념선교회 폴링 선교사와의 동역, 펜윅의 한국순회전도단 결성과 신명균과의 만남을 통한 순회선교 활성화,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 인수후 선교 활동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지도자 육성을 위해 최초의 교육사업인 성경학원을 개원하였다. 펜윅은 신명균에게 충청도 사역을 맡겼고, 신명균은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제2장 대한기독교회(1906-1949)
한국을 위시하여 동북아의 선교에 뜻을 둔 펜윅은 보다 효과적인 선교 사업을 위하여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교단 창립의 준비를 해오던 중 1906년 강경에서 전사역자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교구를 만들고 대한기독교의 총회 조직을 만들었다.
1) 대한기독교회 시대(1906-1920)
2) 동아기독교회 시대(1921-1932)
3) 동아 기독대 시대(1933-1940)
4) 동아 기독교 시대(1941-1949)
2장을 4개의 시대로 나누고 각 시대별 선교 사역과 활동을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1) 대한기독교회 시대 요약
이 시대는 교단 명칭이 정해지고 대한기독교회의 교구가 지정되고 총회조직이 만들어져 대화회란 총회 모임을 통해 각 교회에서 일어난 제반 업무에 대한 사무처리가 이루어졌고 사경회겸 부흥회로 재충전하고, 구역에서 수행된 선교 활동이 보고되었다.
이 시기에 구역이 증설되고 전도 활동이 확장되면서 전도자들의 전동 방식 통일성과 전도노자 지급 등 늘어나는 전도 활동의 지원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였다.
또한 선교의 범위를 한반도만이 아니라 일제 핍박으로 만주 지역과 간도 지역에 이주한 디아스포라 한인 선교를 결정하고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교세가 확장되면서 지도권을 둘러싼 교회 파동이 일기 시작하여 신명균은 조합교회를 조직하여 떠나게 되고 다른 중진 지도자들도 교회를 조직하며 떠나게 되었다. 그 이후 자문기관인 원로교우회를 설치하여 교단의 어려움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지도자급에서 위원으로 임명하고 감목의 선출권을 부여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1915년 일제에 ‘포교계’ 제출 요구를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교회의 수난이 시작되었고, 집회금지, 교단 책임자 이종덕 감목 구금 등 핍박을 받았다.
만주, 간도, 시베리아 러시아 선교 활동에 초대 사역자들의 비화와 순교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펜윅은 두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1911년에 ‘대한기독교회’ 와 1915년 ‘잔속의 생명’이며 자신이 번역한 「신약젼셔」를 1919년 10월 18일에 출판하고, 성경읽기를 독려하였다고 한다.
2) 동아기독교회 시대 요약
교단은 1921년에 동아기독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계속된 전도활동은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동아기독교회 시대를 기점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일본의 박해정책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평북의 자성군 일대에서 순회전도 하던 손상열은 일본군에 의해 1921년에 순교하였다,
1922년 이래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교회의 수난이 계속되었지만 박해속에서 신앙 부흥은 지속되었다. 1925년 펜윅은 러시아와 중국에 있는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하였으며 이것이 팬윅의 마지막 순회선교가 되었다. 만주 길림성에서 김상준, 안성찬, 이창희, 박문기, 김이주, 윤학영은 1925년경 일제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한국 독립당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펜윅은 세상 학교 교육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교간적으로 학교 교육을 폐지하고 성경 교육에만 치중하였다.
당시 일제치하의 핍박을 피하여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교인들이 공산당에게 추방되어 1921년경에 함북 웅기 지방으로 몰려와 있었서 이들을 위한 교단적인 구호 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산당들이 지하에 숨어 준동하면서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살해하였다. 이같은 공산주의 도전 앞에선 교회는 국내에서는 핍박속에서도 성장되어 갔다.
3) 동아 기독대 시대
1933년에 교단 명칭을 동아기독대로 바꾸었는데, 당시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던 때였다. 이런 와중에 동북아시아를 선교무대로 정하고이 지역 복음화에 주력하던 동아기독대는 일본의 무단 정치하에서 사실상 교세가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교단이 어려운 때에 펜윅 부부가 사망하였다. 펜윅의 훌륭한 동역자이며 내조자였던 아내 패니 힌즈는 1933년 1월 19일에, 펜윅은 1935년 12월 6일에 각기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아내 패니 힌즈(Fanny Hinds)는 교육에 천부적인 달란트가 있었으며 어린이들과 부인들에게 성경을 조직적으로 가르쳤다. 뿐만아니라 교단의 어머니로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희생적으로 살아왔다.
더욱이 1932년 일본은 부의제왕을 봉하고 만주국이란 괴뢰정권을 세우고 대륙진출의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작업으로 만주의 교회는 수난을 더 격게되었고 간도와 만주, 시베리아 지역을 두고 활발히 선교하던 동아기독대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1935년 일제는 한국민족에게 황궁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때 김영관 감목은 산하교회에 황궁요배와 신사참배의 부당성과 불복을 ‘달편지’를 통해 전달하였다. 이때부터 일본 관헌의 교회박해는 날로 극심해져갔고 일제는 동아기독교가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거부하고, 천황 모독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1944년 5월 10일 교단을 강제 폐쇄시켰다.
펜윅의 선교 사상과 정신은 비록 그가 한국에 정착하여 선교하고 있었지만 그 지역을 한반도 제한하지 않았고 ‘산과 빈들’이면 땅 끝까지라도 나가 선교 활동을 펼치고자하였다. 펜윅의 전도 방식은 순회전도와 축호전도를 대화회나 당회에서 파송된 전도자를 세워 운영하였다.
또하나의 타 교단 선교사들과 달리 파송한 선교회나 본국으로부터 정규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자급자족 형태의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다는 것이 매우 도전이 된다.
펜윅은 무엇보다 제자훈련에 큰 관심을 갖고 성경과 신학을 교육시켰으며, 실천신학에 대한 교육은 더욱 철저하게 실행해나갔다. 펜윅의 신앙은 이신득구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펜윅은 또한 사람은 누구든지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고 자기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한다고 강조하였다. 펜윅이 몸소 실천해왔던 선교 방식은 토착화이며, 그는 선교사로서 한국인가운데서 한국인의 풍습과 생활양식대로 살려고 노력했으며 한국인 지도자를 세워 한국인에 의한 개척을 중요시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펙윅의 선교는 토착선교의 귀감이 되었으며 토착화의 한 거대한 발걸음이 되었다고 본다.
4) 동아 기독교 시대
이 시기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준비와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펴며 황국요배를 더욱 강화하던 시기이다. 이같은 동화정책의 암적 존재가 기독교와 그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동아기독교 시대는 기독교에 대한 일본의 박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이기도하다.
1940년 원산 대화에서 이름으로 오는 오해를 막기위해 ‘동아기독대’를 ‘동아기독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41년 11월 28일 일본은 만주에 분산되어 있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조선기독교, 동아기독교의 6개 교파를 강제 통합하여 만주기독교연맹을 조직하였다.
일본 당국은 교단해체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동아기독교의 교구와 신조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교단 총부에서는 몇몇 지도자들이 모여 간단한 교구를 작성하고 교리와 신조를 첨부하여 제출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소위 ‘원산사건’이라 불리는 「동아기독교」탄압을 감행했는 데 1941년에는 침례교 신약전서 6,500부의 복음찬미 500부를 소각했고, 1942년에는 ‘동아기독교’의 지도자 32인을 함흥형무소에 투옥시키고 온갖 고문과 구타를 하였다.
급기야 1944년에는 지방법원인 함흥재판소가 동아기독교의 해체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15개월 동안 한국 침례교는 교단 없는 교단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며 해체되었던 교단 복원에 어려움이 있었고 특히 원산에 둔 본부를 상실한 상태여서 복원된다해도 교세는 명맥을 잇는 미미한 상황이었다. 남북의 교회가 두절된 상태였지만 1946년 2월 교단재건을 뜻을 둔 임원 중심으로 재건회의를 소집하기로 모여우선 남북이 통일되기 전까지 남한에 산재한 교회를 규합하여 교단 재건을 결의하였다. 이 때 남한의 교세는 40개의 교회와 350여명의 교인이 전부였다.
1946년 9월 강경에서 개최된 36차 ‘대화회’에서 '감목정체'를 '회중정체'로 바꾸고 교회 직분도 대폭 변경시켰다.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집사'로 개칭했고, '교사'직은 그대로 두었다. 대화회도 총회로 개칭했다. 1947년에는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경북 예천의 일부교회들이 불만을 품고 별도의 대화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립해 나갔다. 비록 10개에 불과했으나 동아기독교의 교세를 더욱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8.15이후 북한 교회는 소련군의 교회탄압과 신앙의 제재로 교단수습과 재건이 어렵게되었다. 박해를 피하여 여러 목사들은 나진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여기서 이들을 중심으로 1947년초에 총부의 재건과 교단 수습을 위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남북이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공산치하에서의 교회는 어려움을 겪다가 북한의 교회는 공산 정권이 강화되면서 6.25동란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1948년 점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특기 할만 한 것은 교단 도약을 위한 새로운 시도 즉 총회산하에 상의위원회를 두어 미국 남침례교회와의 연락을 취하게 된다. 1949년 3월에는 강경에 성경학원을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해 전국에서 입학생을 모집하고 과정을 실행하였다.
∎제3장 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1949-1968)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재건된 교단은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남침례교회와 선교 관계를 맺는 일을 추진하였고, 1949년에는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었다.
1)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1949-1951)
2)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시대(1952-1959)
3)총회분열시대(1959-1968)
3장을 3개의 시대로 나누고 각 시대별 선교 사역과 활동을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1)대한기독교 침례회 시대
1949년 39차 총회를 충남 강경에서 소집하고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했다. 이것은 이미 타교단도 침례교파임을 알고 있으며 교단의 연합된 모습속에 교단 사업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미국의 침례교단과의 제휴를 모색하기로 결의한 사후책의 일환이었다.
미국남침례교회와의 예비접촉을 이루는 과정 중에 교섭위원회 위원장인 한기춘은 몰래 원산 사건을 유발시킨 우태호를 접촉하여 미국남침례교 외국선교부에게 남한교회 상황을 알렸다. 미국 남침례회 외국선교부의 동양 총무인 코오든(B. S. couthen)박사가 참석했다. 그는 동아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적 주장과 신앙행습이 남침례교와 같음을 확인했다. 고딘이 떠난후 총회에서는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침례회’로 개칭하였다. 이 총회후에 대한기독교침례회 총회는 미국 남침례회 총회와 제휴하는 역사적인 출발을 하게되었다. 1950년 2월 마침내 존 A. 애버네티(John A,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부부가 내한하였다. 하지만 내한한 애버네티 선교사를 둘러싼 파벌이 생겼고, 안대벽과 김용해를 중심으로한 보수파가 선교지원의 주도권을 잡게되면서 회중체제의 특성을 잃고 일원체제인 동아기독교 시대로 되돌아간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6.25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교계는 다시 혼돈에 빠져들었다.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가고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오자 교단본부도 부산으로 옮겨 총무로교회에서 사무를 보았으나 한편 상당수의 교단지도자와 교인들은 피난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지키며 박해를 당하고 순교를 당하기도하였다. 1951년 4월 총회는 선교회는 동란을 맞아 순교한 기념 예배와 미국 남침례회와의 제휴와 세계침례교회와의 연맹을 위해서는 교회 직분 명치 변경과 법인설립을 통해 합법적인 교단 승인을 정부로부터 받게 된다. 미국남침례교회에 구호 요청을 하여 한국백성을 위한 구호사업에 착수함으로써 선교사업의 서막을 열었다.
다른 교파의 선교단체와 같이 미국남침례교회의 선교사업은 구제활동도 이 때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의료선교사는 부산에서 구호병원을 개설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개교회에도 구호금, 교역자 생활보조 및 교회당 신축을 위한 보조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시책은 새로 교단을 재정비하려는 대한기독교침례회에는 재건을 위한 활력과 의욕을 일시적으로 불어넣어준 것을 사실이나, 교단 안에 선교부에 대한 의존성과 보조금을 둘러 싼 교역자 간의 교권투쟁, 그리고 타교단 교역자의 대거 유입사태를 가져옴으로써 교단의 장래를 어둡게 만들고 말았다.
2)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시대
미국남침례교는 전쟁중인 구제사업을 통해 한국침례교와 견고히 결합되었고 한국침례교회는 존폐위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발전하게 된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국에서 미국 남침례교의 선교사업이 정착되자 동양 총무 고딘은 에버내티에게 한교선교부를 조직하도록하였다.
1952년에 42회 총회가 충남 칠산에서 개최되었을 대 총회를 연맹총회로 규약을 개정하고 여전도회(W.M.U.)를 조직했다. 1953년에는 대전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1954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신학교의 인가를 받아 나요한 선교사가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또한 소년회(R.A.), 소녀회(G.A.)및 신훈회(B.T.U.)를 조직함으로써 미국 남침례회의 제반 기관들을 교단안에 도입하였다. 풍부한 선교자금의 유입과 집행을 통해 다양한 선교사업(출판, 학원, 신학교, 전도회, 병원, 교단지 발간 등)이 전개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의존적이고 총회와 한국선교부간의 마찰, 과장된 선교 보고가 게재되기도하였다.
1953년 휴전이후 서울에 살던 피난민도 애버내티도 서울로 올라오게되면서 서울에 침례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모금 활동과 미남침례교회 외국선교부의 지원, 미군의 원조 등으로 서울침례교회가 1954년 말 건립되었다.
선교사들의 이상은 놀라왔으나 한국사람과 한국실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는 이들의 선교정책과 사업수행은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면이 많아 시행착오가 속출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지도자들의 행정적 독주와 파당성, 전입교역 자들의 신앙절충주의, 원조와 구호선교에 타성화된 한국교회들의 선교부 의존성 등의 문제는 좌절과 불신을 불러일으키면서 총회와 선교회 간에 갈등과 대립을 조장시켰다.
1956년 총회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한국선교부와 총회간의 시무절차 수립에 대한 결의이고 그 해 10월에 마침내 장일수의 제안에 따라 한국침례교 총회와 미남침례회 선교부는 협력을 위한 공식적인 사무처리 절차가 수립되게 되었다.
우호적으로 협력이 되어왔던 선교부와의 협력관계는 1950년대 중반부터 침례교 이상 과 신앙정신이 투철한 젊은 세대의 선교사로 교체되면서 총회와의 불화가 총회지도자들과의 마찰, 파당성, 토착화되지 못한 프로그램, 총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1957년 충무로 침례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선출한 총회장(안대벽)을 미남침례교 재한선교부는 인정할 수 없다고하여 선교부간의 원만한 관계는 유지되기 어렵다고 결의하고 결별된 행보가 홍콩에서 열리는 선교대회 대표 파견에서도 의견을 달리했다.
주도권 회복을 위한 시도로 1957년 7월 한국침례교총회 실행위원회는 재한 남침례교 선교부에 보낼 제안서를 결의하고 작성하였다. 내적 대립이 1957년 여름 무창포에서 열린 여름캠프에서 윌락스 선교사의 실언으로 두 진영간(안대벽을 중심으로한 주류파와 장일수를 중심으로한 전입파)의 내적대립이 조성되었다.
3) 총회분열시대
1960년대의 한국침례교단은 발전을 위한 역사의 한 과도기적 시련의 시기이다. 1950년대의 미국 남침례교회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정책은 당시의 한국적 풍토나 체질에는 그대로 수용될 수 없는 문화적 거리와 콘텍스트의 토착화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의 외세(선교사)를 둘러싼 한국지도자들의 대립과 경쟁, 이러한 와중에 정치적 변수로 작용된 타교단에서 전입한 교역자들의 제3세력 구축 등의 문제는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어 총회와 선교회의 협동문제가 마침내 결렬됨으 로써 한국침례회총회는 9년간의 교단분열의 역사를 거치게 되었다.
1959년에 두 개의 분열총회가 충남의 대전과 경북 포항에서 각각 개최되었을 때 포항총회는 지금까지 총회를 주도해 온 동아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대전총회는 선교회의 지원을 받는 몇몇 교단의 지도자들과 전입파교역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총회실행위원회 와 선교부 실행위원회간의 대립은 상호 성명서를 내며 분열로구분되기 시작하였다. 분열을 야기시켰던 원인은 교리이거나 신앙 신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총회와 선교부간의 정책적 갈등, 주류파와 전입파간의 파벌, 타교단 교역자의 무분별한 영입, 거기에 편승한 한국인과 선교사의 개인적인 감정 등이 교단 분열의 과오를 낳게하였다고 보여진다.
분열 이후 대전총회는 선교회의 주도로 미국남침례회를 본딴 여러 기관들을 조직하고 그 기관들을 통하여 사업을 수 행하기 시작했다. 침례신학교와 교회진흥원은 대전총회 안에 침례교 신앙정신을 진작시키고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진흥원은 교회학교운동을 전개하고 공과와 제반문헌을 간행 보급함으로써 교단 안에 침례교회 생활을 정착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분열 이후 선교회의 재정지원이 중단된 포항총회는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하지만 결속이 잘되고 평온한 분위기속에 발전을 모색하였다.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들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도움을 받았던 포항총회는 침례교의 신앙정체를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분열기간의 어려움은 양총회에 자구책과 자립정신을 함양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제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던 한국 침례교회들은 1960년대부터 오순절의 성령을 갈급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9년간의 교단분열은 이전에 고착화된 제반 비침례교적 요소들을 여과시키는 반성과 경험의 교훈을 주었다. 이 60년대의 영적 부흥운동은 선교부의 재정적 보조에 의존하던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신앙과 영력을 의지하여 교회발전을 지향하는 계기를 촉진시켰다. 정치와 물질과 권력다툼으로 갈라졌던 총회와 교회들이 말씀과 성령 사역을 통하여 교회와 교단 발전을 도모하는 비전과 확신이 서게 된 것이다.
1968년 4월 16일은 한국침례교회 역사상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역사적인 교단통합을 이루었다. 총회분열 10년이 지나는 동안 양측 총회에도 세대교체가 되었으며 신진임원들은 상호 공통적인 배경을 갖고 있어서 이해와 협조가 잘 이루어지게 되었다. 더욱 양측 총회의 실무진들이 총회합동에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활동으로 임원들과 많은 교회들의 호응을 받게되어 교단통합을 이루어 냈다고 봅니다.
참고자료
도서명: 한국침례교회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편저(집필: 이정수), 침례회출판사, 1996년 초판3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