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패러다임의 요소들

부상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패러다임의 요소들
2019. 6. 13()
도서명: 데이비드 J. 보쉬 ,변화하는 선교(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3, 2017)
12장 부상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패러다임의 요소들: p. 572-670
 
2.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선교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된 하나님의 선교
구원론적으로 해석하여 개인을 영원한 정죄로부터 구출하는 것으로 해석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서구 기독교인의 축복과 특권을 동쪽과 남쪽에 소개하는 것으로 해석
교회론적으로 보면 교회의 확장이나 교단의 확장으로 이해
때로는 역사적 구원으로 간주되어 진화로라든지, 대격변으로라든지 세상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정의되었다.
모든 경우마다 초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했던 기독론, 구원론, 삼위일체론 간의 내적 상호 관계가 은혜에 관한 교리로 점차 대체되었다(Beinerr, 1983:208)
IMC 탐바람대회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서만으로 하나님의 왕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론적 태도만이 교회를 세속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이 웰링건 대회(1952)에서 등장하였다. 선교를 하나님의 본성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이해했고, 선교는 교회론이나 구원론이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게 되었다. 웰링건대회에서 나타난 선교관은 승리주의 관점에서 보지 않았고, 성육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속으로 긴밀한 관계로 보았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의 움직임이다. 선교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다. 거꾸로가 아니다 (Aagard 1974:13). 웰링건 대회 이후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로 보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교회의 선교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단수형 선교(mission)가 우선적이며 복수형 선교(missions)는 파생물이다. 웰링겐대회 이후 스태픈 닐은 복수형 선교시대는 끝났고, “단수형 선교시대가 되었다고 선포했다(1966a:572).
따라서 교회 선교의 주요 목적은 단순히 교회 설립이나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로의 봉사이다.
교회는 선교를 통해 하나님 통치의 약속을 온전히 증거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어둠 및 악의 세력사이에 계속되는 싸움에 참여한다(Scherer 1987:84)
웰링건 대회 이후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은 점차 수정의 과정을 통과하며 구체화되었다. 선교는 창조, 돌봄, 구속, 완성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시는 것이다(Kramm 1979:210). 선교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 창조자, 구속자, 성화자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와 세상을 모두 품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여기서 교회는 참여의 특권을 갖는다(LWF 1988:6-10).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선교가 있다.
3. 구원의 매개로서의 선교
구원에 대한 전통적 해석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이루셨다는 확신은 기독교인들 삶의 가장 중심이 된다. 역사상 선교 운동이 일어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매개하기 위한 열망에서였다. “구원적 동기가장 깊고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선교학의 고동치는 심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Gort 1988:203).
1973년 방콕대회의 주제가 오늘의 구원이었고, 1988년 로마의 어반대학교에서 열린 민족복음화를 위한 로마카돌릭 회중회의 역시 같은 주제가 다루어졌다.
초대교회의 선교를 살펴보면 구원은 종합적으로 해석되었다. 누가에 있어 구원은 이생에서 실현되는 현재적 구원을 말해준다(Stanley 1980:74). 바울은 구원은 과정이고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은 아직이다.
헬라 교부시대에 종말론적 기대가 수그러들었다. 구원이 파이데이아(paideia)의 형태를 취하면서 신자들의 신성화로의 점진적인 상승으로 이해되었다.
비잔틴 교회에서는 구원이 교육적진보로 이해된 반면, 카돌릭과 개신교를 포함하는 서방교회는 죄의 파괴적인 영향과 더블어 교회가 중개하는 위기 경험을 통해 타락한 개인이 회복되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이 서로 분리되어 결과적으로 기독론이 구원론에 복종하게 되었다(Lowe 1982:219; Greshake 1983:72; Beinert 1983:202, 205, 208).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적행위는 개인 및 사회의 안녕과 관련한 그의 섭리적행위와 점점 구별되게 되었다.
이렇게 희석된 구원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교회 활동에 국한하는 협의적 정의가 되었으며 신자들의 사회 참여는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하기 위한 구원과는 관련이 없는 활동으로 보게된 것이다.
근대 패러다임속에서의 구원
계몽주의 도래로 인해 종교에 대한 근대적 비평이 출발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의 표현으로서의 종교, 영원한 구원으로서의 종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이제 구원은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 인간 복지에의 주목, 인간의 도덕적 개선을 뜻했다.
근대주의의 도전에 대한 교회와 선교의 반응은 두가지였다. 첫째 반응은 구원을 전통적 방식으로 계속 정의하고 계몽주의 도전을 무시하는 것이고, 둘째 반응은 근대주의 도전과 이에 입각한 구원관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예수의 인격이 중심이 아니고 예수의 목적이 중심이 된 이상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속에서 죄와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을 나누거나 연합시킨다는 의미가 아니고 인간들 속에서의 나뉨과 연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패러다임속에서 죄는 무지로 정의된다. 서구 선교는 이제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중개하는 위한 교육자가 된 것이다.
교회와 사회에 관한 주제로 열린 제네바대회(1966)에서 임마누엘 메스테네리차드 샤울호켄다이크의 구원의 범주를 사용하여 준거틀을 마련하였다. 메스테네의 준거틀은 근대 산업화, 세속화된 서구였고 계몽주의 의 도전에 도전에 응답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샤울의 준거틀은 제3세계, 곧 불의와 착취, 가난의 경험이 되었으며, 이는 칼 막스의 식민 착취의 도전에 응답하려는 것이었다.
WCC 웁살라 대회(1968)에서는 이러한 두 입장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 시도되었으며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네가지 차원으로 설명하였다:
착취에 대한 경제적 정의
억압에 대한 인간의 존엄성
소외에 대항하는 결속
개인의 삶의 절망에 대한 희망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구원에 대한 근대적 이해 속에 있는 위기
1970년대에 해방주의자들세속주의자들의 구원에 대한 정의로 압력을 받게되었다. 구원이 마치 우리 손안에 있고 우리가 좌지 우지할 수 있고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실제로 구원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은 대답보다는 더 많은 질문들을 야기했다. 검증되지 않은 기술 발전은 의미가 없게 되었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되었다. 성공의 이야기는 재난의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어떤 사람들은 기술이 없는 세상 속으로 물러나려고까지 한다.
현대의 여러 패러다임들이 세상의 필요와 해결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단번에 완전히 새롭게 , 반복할 수 없고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신 것을 증거하는 선교를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Glazik 1979:160).” 기독교 신앙은 비평적 인자(factor)이고 하나님의 통치는 비평적인 범주이며, 기독교 복음은 현대 해방운동의 의제와 동일하지 않다(Beinert 1983:214; Gort 1988:213). 그렇다고 고전적인 해석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이유는
첫째로 구원의 의미를 위험할 정도로 협소하게 해석하여 개인 영혼의 구속받는 것으로만 정의할 때 그러하다.
둘째는 창조와 새창조간에 , 안녕과 구원간에 너무 뚜렷한 선을 그을 때 그러하다.
명심해야할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은 온전하고 치유된 세상을 향하는 인간 사회 상황에서의 구원이다.
 
포괄적 구원을 향하여
구원의 이해와 관련하여 헬라 교부의 선교에서 제기된 첫 번째 모델은 예수의 삶의 기원과 시작, , 선재설과 성육신에 초점을 두었다. 두 번째 모델에서는 서구 선교의 방향을 예수의 삶의 종말,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향했다. 세 번째 모델은 구원에 대한 윤리적 해석으로서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과 사역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는 포괄적인 기독론적 틀안에서 움직이는 구원관이 필요한데 총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으로서 그의 성육신, 지상의 삶, 죽음, 부활, 다시 오심 등 교회와 신학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포괄적인(comprehensive)”, “전체적인(integral)”, “총체적인(total)”, “보편적인(universal)“ 구원의 중개가 점점 더 선교의 목적으로 이해되면서 전통적 모델보다 최근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있다(Waldenfels 1977; Muller 1978; Weber 1978).
우리의 관심이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전능한 운명에 갇힌 자로 보아서는 안되며 교회는 모든 운명론과 침묵론에 맞서 저항 운동을 이루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초월적 성격을 붙잡아야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도록 사람들을 초청할 필요가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4. 정의 추구로서의 선교
역사의 유산
사회정의가 구약성경의 예언 전통의 바로 핵심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선교를 시작한 사회, 정치적 상황은 구약과 매우 다르다. 콘스탄틴 황제 통치시기 기간동안에 기독교는 공인되어 로마안에서 합법적 종교가 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와 비슷해졌다. 콘스탄틴 황제시절부터 근대기가 동틀 무렵 전까지 종교와 정치의 영역은 합쳐져 있었다. 어거스틴 이래로 신적 거룩의 광채와 세상의 어두움간의 대조를 상정하는 경향이 있어왔다(Niebuhr 1960:69). 이러한 유산이 다양한 형태로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로 이어져 왔는데 칼빈주의보다 루터교와 재세래파에서 더욱 그러했다.
계몽주의 도래와 함께 사실이라는 공적 세계와 이상이라는 사적 세계의 완전한 구별로 인해 정치와 국가는 공적 세계에 속하고 종교와 도덕은 사적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간의 유기적 관계가 절단되었고 교회는 공유하는 신앙에 근거하여 국가에 더 이상 호소할 수 없게되었다.
 
정의와 사랑간의 긴장
라인홀드 니버는 이성 윤리는 정의를 목적으로하며 종교 윤리는 사랑을 이상으로 사는다고 말한다(Niebuhr 1960:57). 그러나 종교적 이상안에서 신비적강조가 예언적강조와 나란히 하는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전자는 하늘나라에 중점을 둠으로 현실을 도피하게되는 성향이 짓고, 후자는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사회 참여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에큐메니칼 운동과 현대 가톨릭에서 모두 지배적인 주제는 예언적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이라는 종교윤리는 정의라는 이상을 사랑이라는 이상으로 발효시키는 것을 언제나 목표로한다고 니버는 말한다.
 
두가지 명령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관계라는 수수께끼를 풀려는 한가지 시도로서 영적 명령과 사회적 명령이라는 두가지 명령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첫째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언하는 책무이다.
둘째 명령은 인간의 복지와 정의를 포함하여 인간 사회에 참여할 책임이다.
 
확신들의 수렴
복음주의의 한 국면은 대반전(Great Reversal)”을 반전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개인뿐아니라 사회에 임하게하는 꽉찬(full-orbed) 복음을 구현할 태세가 된 것 같았다. 비슷한 전환이 1970년대 중반 이래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세계교회협의회 나이로비 총회(1975)이래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상반된 방향으로 일어났다. 가톨릭에서도 교황교서는 제2바티칸공의회이래로 가톨릭 사상에 있어서 진일보한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모두 복음주의와 사회적 행위에 대하여 과거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영적인 복음물질적인 복음이 예수 안에서 하나의 복음이라는 점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Me 33).
5. 복음 전도로서의 선교
복음전도: 수많은 정의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은 복음화라는 말을 선호했고, 개신교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복음전도라는 말을 좋아했다.
두가지 문제가 여전히 논란인데 복음전도선교의 차이가 무엇인가하는 것과 복음 전도의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첫째, 선교는 아직 기독교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사역, 특히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사역이다. 선교는 지리적으로 먼 곳의 타인들이 처음으로 개종하여 기독교화되는 경우를 가리키고 전도는 가까운 이웃이지만 기독교와 멀어진 사람들을 재개종, 재기독교화하는 것으로 구분하게되었다(Barth 1957). 선교는 비기독교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복음전도선교보다 더 좁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카돌릭과 에큐메니칼 개신교는 선교를 광범위한 교회활동을 가리키며, 이에 반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선교라는 용어를 피하고 복음전도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신학적으로 선교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사용하여 하는 복음 전도이다(맥가브란)
셋째, 지난 40여년동안 선교복음전도를 동일한 뜻으로 간주한 경향이 있다. WCC 뉴델리대회 후 세계선교 및 복음전도위원회가 구성된 것이 그 증거이다.
넷째, 더한 혼란이 일어났는데 로마가톨릭과 에큐메니칼 개신교에서도 근래에 복음전도”, “복음화라는 말이 선교라는 말을 대치한 것이다. 복음화가 선교를 대치한 가장 뚜렷한 예는 교황 바오로6세의 사도적 권고문(EN)”에서이다.
복음화는 교회가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하는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복음화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직임과 명령 전체를 가리킨다.
 
복음전도에 대한 건설적 이해
(1) 나는 선교가 복음전도보다 더 넓다고 생각한다
(2) 그러므로 복음전도를 선교와 동일하게 간주해서는 안된다
(3) 복음전도는 교회의 총체적 활동의 본질적 차원이며(1954WCC 에반스톤 총회, Lofler 1977b:8) 교회선교의 심장이자 핵심이다(Lofler 1977a:341)
(4)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하실 것에 대한 증거이다
(5) 그렇다하더라도 복음전도는 사람들의 반응을 목표로 한다
(6) 복음전도는 언제나 초청이다(Lofler 1977a:341; Sundermeier 1986:72,92)
(7) 복음전도는 증인이지 심판자가 아니다
(8) 우리의 증거와 그 효과에 대하여 우리는 겸허한 태도를 가져야 할지라도 복음전도는 필수적인 사역이 되어야한다
(9) 복음전도는 전도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밝히 드러내고 매력적인 생활양식을 보일 때 가능하다
(10) 복음전도는 현재적 선물과 영원한 축복에 대한 확신으로서의 구원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11) 복음전도는 교파간 개종이 아니다(Lofler 1977a:340)
(12) 복음전도는 교회확장과 동일하지 않다
(13) 복음전도와 교인 모집을 구분하는 것은 양자가 단절되어 있다는 듯이 아니다(Watson 1983a:71)
(14) 복음전도는 오직 사람들에게 행해지고 오직 사람들이 반응해야한다
(15) 진정한 복음전도는 항상 상황적이다(Costas 1989:passim)
(16) 그렇기때문에 복음전도는 정의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 실천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17)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는 장치가 아니다(Johnston 1978:52)
(18) 복음전도는 입술의 선포만이 아니다(Watson 1983b:6; McGavran 1983:190)
 
6. 상황화로서의 선교
상황화 신학의 기원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말은 1970년대 포 신학교육기금진영에서 먼저 제시하였다. 이 개념은 곧 주목을 받아 다양한 신학 모델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욱풍(Ukpong 1987:163-168; Schreiter 1985:6-16; Waldenfels 1987)은 두 개의 주요한 상황 신학을 언급했는데 토착화 모델 (번역 모델과 문화화 모델)과 사회-경제 모델(정치신학, 계발신학과 같은 진화적 유형;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과 같은 혁명적 유형)이다. 본서의 시작부터 밝힌 기본적인 주장은 기독교회의 선교적 메시지는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의 생활과 세계속에서 성육신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상황적 성격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이전에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모두 비정통이나 이단으로 구정되어 파문되거나 박해를 받았다.
 
인신론적 전환
상황신학은 전통신학과 비교할 때 인식론적 전환이 그 특징이다. 분파로 분류되는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제외하고는 콘스탄틴 황제이후 신학은 엘리트들의 활동이자 위로부터의 신학이었다. 이러한 신학의 출처는 성경과 전통이라기보다는 철학이었고 화자는 주로 불신자였다. 반면 상황 신학은 아래로부터의 신학”, “역사 밑면의 신학이고 출처는 성경과 전통이 아니라 사회 과학이고 화자는 주로 가난한 자나 문화적으로 소외된 자들이었다(Frostin 1988:6).
새 인식론에서 중요한 점은 실천(praxis)의 강조였다. 서지오 토레스는 전통적인 서구 인식론과 새로운 인식론 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식을 얻는 전통적인 방식은 진리가 어떤 특정 대상에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부분적으로 서구 철학 전통에 끼친 헬라의 영향이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다른 방식이 있는데 변증법적 방식이다. 이 경우, 세계는 인간이 대면하고 이해하고자하는 정적인 대상이 안라 오히려 지어져가는 미완성의 프로젝트이다. 지식은 대상에 대하여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과 새로운 세계의 건설에 몰입하는 것이다(Appiah-Kubi & Torres 1979:5).
 
이같은 실용적 진술로부터 새로운 인식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수신학이든 자유주의신학이든 지식은 중립적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구 과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서구 신학 역시 서구의 관심을 따라 고안되었다.
둘째, 새로운 인식론은 세상을 정적인 대상물로만 이해하고 세상을 설명하려고만 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셋째, 토레스의 주장에서 암시되었고, 많은 상황신학자들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 바로 신학의 최우선적 행위로서 헌신을 강조한 것이다.
넷째, 이러한 패러다임속에서 신학자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고뇌를 조사하고, 평가하는 옥상 위의 외로운 한 마리의 새가 더 이상 아니다.
다섯째, 행동하는 신학이 강조된다.
여섯째, 이런 우선 사항들은 상황신학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풀어간다.
 
상황화의 모호성
(1) 상황화로서의 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하신다는 확언이다 (Schmitz 1971)
(2) 상황화로서의 선교는 다양한 지역신학의 구축을 포함한다 (Schreiter 1985)
(3) 각 상황에서 신학이 주조되고 상황에 따라 신학이 주문 제작되는 상대주의의 위험 뿐 아니라 상황주의(contextualism)를 절대화하는위험 역시 있다
(4)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이슈를 다른 각도에서, 즉 오늘날 교회론에서 논의되고 있는 표현인 시대의 표적을 읽는다는 각도에서 보아야한다 (Gomez 1989:365)
(5) 상황이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신학적 통찰을 위한 유일한 권위로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Stackhouse 1988:26)
(6) 스택하우스(Stackhouse)는 우리가 상황화를 프락시스(praxis)와 이론간의 문제로만 해석한다면 전체 상황화 논의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7) 가장 훌륭한 상황 신학은 믿음과 소망, 사랑이 함께 하듯이 이론과 프락시스, 포에이시스(poeisis)가 함께하는 신학이다
오늘의 에큐메니칼 선교 패러다임 요소들이 주는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부상하는 선교 패러다임의 구성 요소들은 확정된 모델로서 정착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해석을 발전시켜왔으며 앞으로도 시대의 표적을 해석하는 한 방법으로서 복음전파와 선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어야한다고 보여진다. 교회는 단순한 고형화된 조직이 아니라 유기적 기관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이되며, 예배와 기도와 체험과 성만찬/침례 의식 등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더 성숙시켜나가는 세상속에 침투되어 하나님 나라의 완전성을 구현해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20세기동안 교회에 대한 이해가 변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신적 기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되었고 교회와 선교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부각되었다고 본다. 시작부터 교회와 선교가 서로에게 속하기 때문에 선교없는 교회나 교회없는 선교나 모두 모순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성례, 표식, 도구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것은 교회와 세상간의 관계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Crum이 말했다시피 교회는 두 초점을 가진 타원으로 보았다. 첫번째 초점은 자신의 삶의 원천을 인식하고 향유하는 예배와 기도가 강조되며, 두 번째 초점은 교회는 세상에 참여하고 세상을 도전하는 봉사와 선교와 복음 전파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 본다. 지금에 와서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의 대상이 되었으며 계속적으로 돌이키고 변화를 가져와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미션을 드러낼 것이라 보여진다. 선교하는 하나님은 교회가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적 실체이며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뗄 수 없는 연합인 것을 말하여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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