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시대 선교(1492-1773)

발견의 시대 선교(1492-1773) 발제
2019. 4. 18()
도서명: 스티븐 베반스 & 로저 슈레더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서울: 도서출판 케노시스, 2011)
발견의 시대 선교(1492=1773) 정복자, 예언자, 구루: p. 325-380
 
개관
15세기 후반 16세기 초반 : 라틴 서방교회의 약화와 반종교 개혁 운동
1492년을 기점으로 카톨릭 교회는 서구의 정치적, 경제적 팽창과 침략을 따라 선교는 국가와 교회가 협력하여 전개되었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협력은 서로 노골적인 충돌을 야기하는 다른 선교 모델을 출현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하였다.
초기 콘벤토예수회의 축소모델은 정복자의 선교 즉, 제국주의 선교를 반대한다. 동시에 아시아에서는 적응하는 구루, 학자, 대화 상대의 접근을 함으로써 타불라 라사(. 선교지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고 선교사 본국의 문화와 신학을 이식하는 선교 방식‘)와 대립 관계로 발전하였다.
로마 카돌릭 선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후원아래 대부분 타불라 라사적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부분적으로 적응방식이 아메리카와 아시에서 적용되기도 하였다.
초기 개신교 선교는 종교개혁이후 근 200년동안 선교 활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는 교회생존과 발전에 에너지를 쏟고 타 종족과의 접촉 미흡으로 자체 선교 모델을 개발해나가는데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비잔틴 동방 교회의 선교로 러시아 정교회는 시베리아, 중국 그리고 볼가강 지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발견의 시대동안 카돌릭 교회의 팽창 선교를 종결시킨 사건은 1773년 예수회의 탄압이었다.
 
서방 교회의 선교
사회 정치적 상황
15세기 말 교회의 힘을 압도하는 절대 군주 정치의 등장, 중요한 과학 기술의 발명에 기초한 항해 기술의 발전으로 미지의 무역 항로를 개척하려는 열망, 이 새로운 무역 항로의 발견은 중요하였는데 붕괴되는 봉건제도와 농업제도를 대체하는 유럽의 산업혁명 과 지리적 발견이 지구에 대한 개념을 다시 재고해볼 수 있도록 도전하였다. 유럽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가능성과 동시에 불행하게도 새로운 정복에 대한 비전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예를들면, 군사적 농업적 목적을 위해 노예를 필요로 한 터키 무슬림과 사탕수수 재배지에 일손이 필요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을 발전시켰다. 난폭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일들 중의 하나를 만들고 말았다.
 
종교적 상황
당시의 새로운 도취 행복감은 신대륙의 새로운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부푼 종교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유럽에서 병행된 종교적 갱신이 개신교와 카톨릭 종교 개혁에 있어서 명백하였다. 개신교는 더 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갈망하는 인간의 정신을 표명하며 16세기 루터, 쯔빙글리, 깔뱅 그리고 재세래파의 초기 신앙 부흥은 17세기 청교도 및 퀘이커 교도의 출현과 경건주의 운동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그런 반면에 카톨릭 교회의 종교 개혁은 분명히 반개신교 논쟁에 의해 초래된 것이기에 반동 종교개혁으로 부를 수 있지만 종교 갱신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하나의 종교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양측의 부흥의 날개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함의 수준을 더 신약 성경의 표준에 가깝게 들어 올리는데노력하였다. 이 시기가 바로 선교라는 용어가 현재의 의미로 시작한 때였다.
 
제도적 상황
종교적[수도원] 운동이 유럽의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각성시키며 도전하고 있던 동안에 제도권 교회는 14세기에 일어난 교황권을 차지하려던 교황들의 스캔들 이후에 평정을 다시 얻고자 노력하고 있었으며, 15세기 와 16세기 초반까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은 부와 정치권력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군주제 아래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새롭게 발견한 땅을 관리하기 위해 교황은 보호권제도를 만들어서 선교 사업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신정주의 정치의 사고 속에서 공식적인 정복의 목표가 서로 연관성을 가졌는데 그것은 정복한 땅을 병합하는 것과 세례받은 사람을 카톨릭 교회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17세기 후반부에 교황은 선교에 대한 교회의 정당한 의무를 다시 천명하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1622년 포교성성(S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현재 명칭은 인류복음화성, 기독교 선교 활동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로마 교황청의 심의회)의 설립으로 절정에 다달았다.
 
아메리카 카돌릭 교회의 선교 모델
 
배경
1492년 그라나다 전투에서 승리를 기점으로 무슬림으로부터 영토 회복과 더불어 콜롬버스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대륙과 사람들을 향하여 이교도 정복에 맞추어 금관 은을 찾는 경제적 문제와 연결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도전을 충족시키기 위해 칼과 십자가를 결합시켰다. 군사적인 정복의 상황에서 유럽 사람과 아메리카 사람의 충격적인 만남은 서로 다른 많은 차원의 문화적 충돌이었다. 저변에는 서로 다른 두가지 세계 이해와 존재 방식사이의 충돌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 원인은 영양부족, 먹는 것의 변화, 면역력이 없는 새로운 질병, 극심한 노동으로 사회적 붕괴와 문명 파괴가 그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스페인은 1503년에 엔코미엔다 제도(나중에 노예제도로 전락됨)를 확립하여 원주민을 특정 스페인 정착민에게 맡겨 기독교 신앙교육과 노동을 사용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도 부여받았다. 기독교 신앙으로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은 노예로 전락하였다.
많은 선교사들은 이 공식적인 국가교회 선교의 범위 안에서 후원하고 일하였다. 그러나 일부 다른 사람들은 학대와 부정을 고발함으로써 스페인 왕관의 제도적인 양심이 되기도하였다.
마야 문명
마야 문명권은 대체로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멕시코 남동부에 있는 반도) 일대와 과테말라 , 온두라스 서부의 고원 지대, 엘살바도르 일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하였다.
AD300년경부터 수백 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던 마야 인들은 9세기경부터 장대한 신전과 궁전들을 버리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구장 디에고 데 란다(1542?~1579)1560년대에 마야의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잉카 문명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현재 페루 볼리비아)을 지배한 고대제국
1530년대 초, 최신무기로 무장한 스페인 침략자들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아즈텍 문명
아스테크 문명이 멕시코 시티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의 중심부에 위치
아즈텍 제국은 1486-1502에 절정에 이르렀고, 1519년 콜테즈(cortez)가 이끄는 스페인 원정군들이 걸프해안에 상륙하면서 약화되어 1521년 붕괴하였다.
 
국가교회 선교를 여러 측면에서 반대한 대안적인 선교 모델로서의 다른 접근을 살펴보고자한다.
바돌로메 라스 카사스의 예언자적 모델
히스파니올라(지금의 하이티와 도미니크 공화국)에서의 정복 초기의 잔임함과 학대에 반응하여 1511년 도미니크회 사제인 베드로 코르도바는 제도 자체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안토니오 몬테시노스를 선택했고 엔코멘데로(엔코미엔다 제도[1]의 권한을 부여받은 보유자)를 대표하는 프란시스코회 수도사인 알론소 에스피나와 논쟁으로 1512년 부르고스법이 만들어져 엔코미엔다의 남용을 막는 조항을 만들었으나 실제로는 그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며 금광을 채굴하는데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바돌로메 라스 카사스는 초기에 엔코미엔다의 경영자이었으나 1514년 잔학상을 목격하고 도미니크 수도사의 예언적 증거로 인하여 중요한 회심후 인디언의 대변자로 그 이후 52년동안 저술과 설교를 통해 정복과 전쟁, 또 그에 따른 악(엔코미엔다 제도)을 반대하였다.
라스 카사스그들 자신의 방식과 종교에 대한 권리 인정을 기초로 한 평화로운 선포 및 설득과 대화에 의한 복음화를 강조하였다.
1537년에 수블리미스 데우스라고 명명한 교황청의 교황칙서 (Papal bull)를 내릴 때 영향을 미쳐 원주민의 기본적인 인간 존엄성을 나타내는 교황의 공식 성명으로 내게되였다.
 
콘벤토(Convento) 모델
네 다섯명의 선교사가 그리스도인 마을에서 함께 사는 여러 스페인 가정과 수많은 원주민과 함께 한 콘벤토를 이루었다. 종종 스페인 정착민과 땅 소유자들의 목사(Chaplain)가 되었던 당시 세속 교역자들과 달리 정복을 탈피한 복음화를 실천하였는데 과테말라의 베라쿠르즈 지역의 원주민들은 복음화의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복의 영향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군사적 문화적 정복의 면과 타볼라 라사[2](tabula rasa)의 견지에서 보면 1531년에 테폐약(Tepeyac)의 언덕 위에서 후안 디에고[3]에게 과달루폐 성모 (the Virgin of Guadalupe)의 발현은 스페인과 신스페인을, 기독교 신앙과 나와틀(Nahuatl) 세계를 연결하였다. 이 현상은 문화적 저항과 연합의 상징이 되었고 혼돈의 시대에 원주민의 문화적, 종교적, 인간적 존엄성을 선포한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20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던 콘벤토 모델의 수정된 형태는 정복과 점점 더 타협하고 말았다.
 
예수회의 정착촌 모델
식민화 과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페인 왕국은 이미 1503년에 정착지 또는 정착촌으로 모이는 것을 원주민들에게 명령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인간화하고 문명화하여 결국 복음화하겠다는 의도였다. 수많은 시도가 실패를 거듭한 후에 도미니크회 수도사는 과테말라에 베라파즈(Verapaz, ‘진정한 평화의 땅이란 뜻)라는 정착촌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하지만 1570년 페루의 승리 직후에 프란시스코 톨레도는 강제로 모든 원주민이 엔코멘데로의 통제 아래 정착촌으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한 새로운 형태의 정착촌이 1606년경 파라과이 과라니족을 위해 설립되어 엔코미엔다의 남용을 피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초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회는 여전히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의 과오를 범하여 자체적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준비를 해나가지 못했다. 정착촌은 새로 창설된 예수회 지휘아래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예수회의 정착촌은 이후에 다양한 형태의 그리스도인 마을을 이루려했던 선교 역사의 여러 시도의 가늠자가 되었다.
 
프랑스 선교의 접근 방법
평상시 입는 사제복 때문에 검은 옷을 걸친 사람이라고 알려진 예수회는 1611년에 시작하여 복음화의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계속 증가되는 식민지의 모피 무역 기업들과의 논쟁을 했어야했고, 프랑스 정부보다는 후원자들에게 의존적이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원주민을 선교 공동체 안으로 끌어오기보다는 대개 원주민이 있는 그 세상으로 들어갔다.
이로쿼이족과 같은 유목 민족사이에서 선교사들은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이러한 보다 순응적인 접근(accomodational approach)은 후에 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동료 예수회 사람들의 접근과도 유사했다.
프랑스 평신도들은 헌신된 교리 교수자이자 예수회 동역자로서 선교사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술라회의 멤버였던 마리 (Marie de l’Incarnation)1639년에 퀘벡에 도착하여 북아메리카에서 여학생을 위한 최초의 학교를 창설했다. 우술라회와 사랑의 딸 회(daughters of Charity)는 프랑스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카톨릭 개혁 특히 자선, 간호, 교육 그리고 선교사역의 영역에서 여성 사도직의 발전를 대표하였다.
예수회의 이삭 조그스(Isaac Jogues)1636년 신프랑스에 도착하여 후론 족에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이로쿼이 연방의 모호크족의 한무리에게 체포되어 노예가 되기도하였다. 도망쳐 나왔다가 다시 평화협정을 중재하기 위한 프랑스대사로 몬트리얼의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 사이에서 사역하였다. 예배기물을 담은 상자를 남겨둔 것이 모호크족은 흉년과 재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살해되어 순교하게 된다. 조그스는 성자로 추앙받는 북아메리카 8명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다.
요약하면 라스 카사스를 비롯한 사람들의 예어자적 모델과 초기 콘벤토 모델은 정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요한 대안이 되긴 했지만 1550년대 이후에 점차 강한 반 정복의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 후에 예수회 정착촌은 선교의 가장 강력한 반 정복 선교 모델로 부각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평화적 복음화를 위한 노력은 인디언을 식민지의 기독교 왕국으로 개종시키려했던 왕권의 복음화 전략에 의해 패배하였다.’
 
아시아 카돌릭 교회의 선교 모델
배경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크, 어거스틴 수도회가 아시아에서의 선교 사역에 매우 활동적이이었던 반면, 처음부터 예수회는 적응을 통한 선교 접근을 형성하는데 지배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당시 로마 카톨릭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반영한 예수회는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 선교사들의 타블라 라사 방법과 포르투갈의 정복 정신과 대립적인 입장에서 선교가 이루어져나갔다.
 
프란시스 하비에르 (Francesco Xaiver, 1506-1552)
바스코 영토 스페인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파리 쌩뜨 파르브대학에서 교육을 받던중 로욜라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예수회창립멤버로 남인도 타밀나두주 남동쪽 해안 진주잡이 파라바들사이에서 사역한 카톨릭 선교사이다. 파라바 사람들의 구전 문화를 활용하여 신조, 십계명 등을 현지어로 번역하여 노래로 만들어진 기도 형식으로 가르쳤다. 나중에 말레이반도 말라카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 열정을 보였다.
앤드류 로스기도와 찬송가를 현지 언어로 번역해야한다는 하비에르의 고집은 신앙과 더블어 포르투갈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게끔 한 지금까지의 상황을 깨트렸다고 지적한다. 또한 인도의 순진 무구한 희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식민주의자들의 수치스러운 행동과 탐욕과 태만을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하였다.
하비에르의 일본에서의 선교는 그의 관심을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봉건 영주에게로 돌려서 상당수의 불교 승들과도 토론하였고, 그 중에 일부는 세례를 받기도하였다. 봉건 영주와의 관계는 일본인과 선교사사이의 종교적, 문화적 간격을 좁히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비에르가 일본에 머문지 27개월이 되었을 때 대략 천명이 세례를 받았다.
 
알렉산드로 발리그나노
교황청 파송의 동양 방문자로 임명된 34세의 발리그나노파드로아도 제도(.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선교의 경비를 국가에 부과하도록 한 제도) 와 정복자 정신으로부터의 탈피에 대한 도전을 받는다.
발리그나노41명의 예수회 선교사 그룹을 결성하였고, 아시아에서 일하는 선교사들과 포루투갈 시 당국 또는 교회 당국으로부터의 훼방을 막을 수 있는 협정을 세우는데 예수회 상부의 지시를 따랐다.
리스본을 떠난후 20년동안 발리그나노부드러운 혹은 감미로운 방법에 기초한 선교 모델을 개발하려고 했다. 일본에서 시작한 후 일본인을 성직자로 준비하고 받아들이는 일, 하비에르가 시작했던 실천, 즉 성서와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지방 언어로 번역하는 일, 건축, , 다이어트와 사회적 격식에 따른 선교와 교회 양식의 적응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일본에서 말씀 사역 헌신자로 수도원적인 조직과 선불교의 삶의 스타일을 모델로 한 공동체 그룹인 오주쿠(dojuku)를 세웠다. 또한 예수회의 선교사나 성직자가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을 때 일본 교회가 자생적으로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캄보(kambo)란 지역 장로제를 확립하였다.
일본 선교의 경험과 실수를 보완하여 중국에서는 번역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와 정치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함께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에서 16세기 예수회의 선교 모델을 형성했던 이러한 발리그나노의 적응 접근법예수회는 부름받은 상황에 개방적이고 책임성이 있어야한다.’는 예수회의 원리에 충실하였다. 정복주의와 선교의 타블라 라사 멘탈리티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서 발리그나노는 필리핀 또는 새로운 스페인(남미)으로부터 온 선교사, 예수회를 포함하여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들어갈 어떠한 선교사도 원치 않았다.
 
마테오 리치
중국에서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던 마태오 리치는 중국인들의 종교적 본질을 잘 반영하여 불교 승려의 옷과 삶의 형태를 취했다. 그의 공자의 고전 문학을 배우며 중국학자들과의 긴밀한 대화와 접촉 그리고 그 자신의 저작과 번역 작품 때문에 리치는 승려의 정체성에서 지식 계급의 일원으로 사는 자로 바뀔 수 있었다.
리치는 종종 유교에 대한 자극적인 토론과 색다른 해석의 열린 지적 환경에 처하였다. 그래서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종합했던 것처럼 철학과 유교사이에 일종의 혼인을 위한 기초를 놓으려는 기회를 가졌다.
더욱이 리치의 해시계, 시계, 지도 만들기, 수학에 대한 서구 과학적 지식은 식자층과 또 다른 연결고리를 제공했고 결국 황제의 궁정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중국에서 15년 생활한후 1598년 리치와 그의 동료들은 마침내 제국의 수도 베이징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 후에 몇몇 중국의 역사가가 리치서구로부터 온 현자라고 언급했다.
리치는 항상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 사람들에게 개방적이었는데 이는 예수회 선교사와 그들이 선포한 신앙이 더 이상 낮설지 않고 어떤 점에서 중국적인, 참되게 중국적이며 기독교적인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가 비로소 민족의 회심을 위한 과제를 맡을 수 있다고 보았다. 리치가 직면한 핵심적인 이슈는 조상숭배였다. 리치는 그것을 효성으로서 조상숭배의식으로 발전한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조상숭배 의례를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결정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약간 변형된 형태의 조상제사 의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후에 그는 중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있고 적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로베르토 데 노빌리
프란시스 하비에르가 몇 년동안 일했던 타밀나두주의 마두라이에 도착한 로베르토 데 노빌리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외국인이 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먼저 사역했던 곤잘보 페르난데즈는 인도 풍습을 미신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복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발리그나노리치의 영성에 따라 데 노빌리는 인도인이 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양립할 수 있으며 그 자신을 인도 사회에 적응 시킬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언어를 마스터하고 샤프론 예복을 입고 자선의 지혜로 살아가며 묵상과 기도의 삶에 헌신한 경건한 인도 사람(sannyasi, 거룩한 사람이란 뜻, 힌두교의 탁발승, 서냐시라고 발음함, 힌두교의 삼신-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보존의 신 비슈누 와 파괴재생의 신 시바)의 엄격한 삶의 방식을 따랐다.
데 노빌리는 인도 기독교인이 관습과 풍습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그런 것들을 종교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는 사회적인 차별과 분리를 가져온 고대 카스트제도를 받아들였으며 상류 카스트들과 교류하였다. 그 결과 다른 카스트 계층과 심지어 유럽인 동료들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그는 두 그룹의 선교사 즉 상류 카스트를 위한 브라만산야시(Brahmanasannysis) 선교단체 와 하층 카스트를 위한 판다라스와미(Pandaraswamis)[4]를 위한 선교 단체를 구별하여 형성했다.
그의 꿈은 비록 실현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도에서 신학교를 설립하고, 힌두 철학의 어떤 원리에 기초하여 기독교 교리를 가르칠 것을 제안했다. 이같은 접근 방법에 대한 공격은 일부는 교회안의 사람들이었고, 또 다른 부류는 브라민들이었다. 1623년 교황 그레고리 15세는 데 노빌리의 방법을 승인하였지만 결국은 의례 논쟁에 의해 정죄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브라민들의 수가 적을지라도 데 노빌리(서구 교회)기독교의 신앙을 복제되지 않는 방법으로 전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보고 있다.
데 노빌리마드라스(Madras, 오늘날 첸나이) 근처의 마일라포레(Mylapore)에서 완전히 시력을 잃고 극빈한 가운데 보내다가 1656116일 사망하였다. 그가 50년간 남부 인도에서 보내면서 인도 세계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개척자로서의 탁월한 재간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현지화 하는 그의 선교전략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데 로드 (Alexander de Rhodes)
일본에서 선교 사역이 어려워지자 1624알렉산드르 데 로드는 베트남에 들어갔으며 베트남 기독교의 기초를 다진 선교사가 되었다. 로마자 알파벳으로 베트남 언어 체계를 개발했으며 새로운 문자로 저술된 책들과 교리문답은 베트남에서의 첫 번째 기독교적인 작품이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외국 문화와 동일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를 베트남 문화 요소 위에 세우고 베트남 문화 요소의 변혁을 시도하였으며 그 문화 요소를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수용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교와 조상숭배에 대해서는 리치나 중국에 있는 예수회 동료들보다 덜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효성이 베트남 문화에 있어서 중심적인 가치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것을 기독교의 실천적 대안으로 대체했다.
그의 선교 방법의 다른 중요한 양상은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평신도 지도자들을 두어서 일할 수 있게 한 것인데 그 영역은 예배, 설교, 교육,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줌으로써 그들 자신이 선교사가 되어가는 것을 포함하였다.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런 영역에 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들 베트남 기독교 지도자들은 깊은 신앙과 기적과 박해를 견디는 용기를 가진 삶으로 베트남 기독 신앙의 공동 창립자로 간주되었다.
알렉산더 데 로드1645년 베트남으로부터 영구히 추방되었으며 이는 베트남 사제와 주교 설치에 대한 그의 강한 주장과 파드로아드 제도(. 선교의 경비를 구가에 부과하는 제도)에 대한 저항때문이었다. 추방된후 로마와 파리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후 그는 페르시아의 예수회 선교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도 베트남에서 가졌던 같은 정신으로 선교사역을 계속했다.
 
포교 성성(SCPF)
16세기 후반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선교사역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자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교보호권의 폐단을 막고 선교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1622년에 포교 성성을 설치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에게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그 식민지에 대한 선교 활동도 병행할 권한과 의무를 허락했다. 교회는 이를 선교 보호권’(宣敎 保護權, Padroado)이라 불렀다. 하지만 선교 보호권은 처음부터 교황청이 목적한 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폐단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두 나라 왕들이 선교 보호권을 제한 없이 남용한다는 것이었다. 국가 통치 정책에 순응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만이 주교와 장상으로 임명됐다. 선교사들은 마치 십자군처럼 한 손엔 성경을,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식민지 개척에 따라 나섰다.
기독교가 외국의 정치권력과 외무성에 연결되었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한 중요한 관심은 포교 성성이 비서구문화에 대한 개방과 적응적 접근을 갖으려했다. 그러나 선교의 상황은 카톨릭 교회가 의례 논쟁에 얽히게 되면서 아주 복잡하고 어렵게 전개되었다.
 
의례 논쟁과 선교활동의 쇠퇴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서 다양한 요소가 의례논쟁으로 발전하였다. 관할권 면에서 포르투갈은 프랑스(의 교황청 파견 선교사)와 반목하였고, 파트로나투스[5](Patronatus, 보호권조약) 체제는 포교성성과, 예수회는 해외선교회(MEP,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치하였다.
예수회는 다른 선교단체가 비서구의 문화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다른 선교 단체들은 예수회가 기독교를 팔아치우고타협한다고 비난했다. 예수회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개연론[6] 신학을 견지했다. 개연론은 얀센주의 신학에 의해 심각하게 대립되었는데, 얀센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문화에 대해 보다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예정론에 관심을 가졌으며 프랑스에 강한 기반을 두고 있다.
거친 논쟁을 촉발했던 핵심 문제는 중국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상제), 장례식과 조상 숭배에 관련된 의식 참여, 인도 카스트제도에 개입하는 한계 범위, 성례전 의식이 민감한 문화에 적응하는 문제 등 이었다.
의례 논쟁을 회고해볼 때 많은 요소들이 아시아의 실제와는 관련이 적고 그 요소들이 적응 접근법의 정죄중국으로부터 선교사들의 추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 논쟁에 관계된 그러한 요소들이란 대화와 이해의 부족, 유럽에서 정치적이며 국가적인 의제, 선교단체들사이의 라이벌 의식, 중국 황제의 간섭, 파트로나투스 제도포교 성성 사이의 충돌 등이다. 더욱이 예수회는 1773년에 정치, 경제, 신학, 교회, 사회 등의 복잡한 요소 문제로 해체되었다.
 
개신교내의 선교 모델
종교개혁자들의 일차적인 강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무엇을 하였는가하는 것이며 인간이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었다. 즉 선한 행위보다 믿음의 우선 순위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살아있는 믿음의 활동을 강조했고, 칼뱅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개신교 역사의 첫 200년동안 선교활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에너지와 초점을 교회의 생존과 개혁과 정체성 확립에 맞추어져있었다.
둘째,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나라들은 대부분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종족들과의 접촉이 별로 없었다
셋째, 개신교가 거부하였던 수도원주의와 종교적 수도회를 대체하기 위해 스스로의 선교 모델을 발전시키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선교는 로마 카톨릭과 비슷하게 국가 권력자와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세례파 운동 안에서 다른 종류의 선교 모델이 나타났다. 재세례파는 카돌릭과 개신교의 구분된 교구와 그 영역안의 교회 직분에 대한 생각을 거부했다.
개신교와 재세례파의 선교 운동들
-헤르만 프랑케의 할레대학의 설립과 바르톨로메 찌겐발그 선교사의 경건주의 운동 전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끊고 직업선교인 모라비아 운동을 시작한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
-네델란드의 ‘2차 종교개혁과 영국 스코트랜드와 미국의 식민지 청교도주의 결과로 화란과 앵글로 색슨의 칼빈주의의 선교 비전
경건주의 운동 이전의 선교 활동들
-존 엘리엇1640년대에 메사추세츠의 원주민들과 함께 기도하는 마을설립과 함께 선구적 청교도 선교사역 시작
-선교 목적에 전적으로 헌신한 1649년 영국에서 시작된 뉴 잉글랜드 회사(the New England Company)의 선교 단체
-조나단 에드워드 대각성 운동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미국 원주민 선교
 
데이비드 보쉬개신교 초기 200년의 선교 모델의 특징은 서로 반대하는 접근 사이의 변동이라고 묘사하였다. 예를들어 대다수의 개신교도는 교회와 국가간에 상호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받아들였음에도 주목할만한 예외인 재세례파, 경건주의자 그리고 2차 종교 개혁자 중 소수와 퀘이커 교도가 발견된다.
예수회가 1773년 억압을 받았을 때 기독교는 유럽, 러시아, 인도, 에티오피아를 넘어 아메리카와 필리핀,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소수 민족들에게 그리고 아프리카의 해안의 고립된 지역에까지 전파되었지만 교회안의 다툼과 선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복음은 증거되었지만 그 열매는 방해를 받았다.
 
발견의 시대 상황에서의 상수
지배적인 선교 신학은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14:23)’는 본문에 근거하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당성을 가지려하였다.
중세기 내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하는 관점에서 교회를 거부하는 세상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구원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 되었던 세계관 안에 갇혀있었다.
16세기 초기에 교회 자체의 내부 분열(종교개혁)과 신대륙 발견으로 이 관점이 극적으로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시대 선교 (1492-1773)
지리적 상황
아메리카
아메리카
선교의 주도권
로마 카톨릭 제국(국가)
로마 카톨릭 예언자(수도회/평신도)
지배적 선교 모델
제국의 정복 선교
예언자 중심의 적응 선교
선교의 핵심 인물
국가-교회 선교의 남녀
라스 카사스, 초기 콘벤토, 예수회 정착촌, 우루술라회 마리, 이삭 조그
신학 유형
현지문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갖는 법/교리 강조
역사적 현실속에 정의 요청하는 역사/정착촌 건설을 한 예수회는 법 강조
주요 신학자
기네스 드 세플빠스
데 비토리아, 데 소토, 베가
상수(Constants)
기독론
강조됨, 그리스도는 왕
덜강조됨, 가난한 자의 그리스도
교회론
제도적 모델, 가시적 교회 중시
사자, , 순례자 교회, 가난한자의 교회, 겸손한 자의 교회
종말론
미래적 개인적 종말론 강조
시작된 (임박한), 역사적(현세적)
구원
영적 관점에 치중, 교회를 통해서만
통전적으로 다룸, 잠재된 암묵적 신앙
인간론
부정적
긍정적
문화
부정적, 반문화 모델, 타불라 라사
긍정적, 번역 모델, 적응적
 
아시아 발견의 시대의 선교 (1492-1773)
지리적 상황
동남 아시아
동북(중국) /중앙 아시아
아메리카, 아시아, 스칸디나비아
선교의 주도권
로마 캐톨릭 제국
로마 캐톨릭 선교사
개신교
지배적 선교 모델
타불라 라사 접근
적응
복음전도자
선교의 핵심 인물
도미니크회, 해와선교회(MEP)
발리그나노, 리치, 데노빌리, 데 로데스
찌겐발그, 플뤼차우, 진젠도르프, 브레이너드, 울만, 엘리엇
신학 유형
법 강조
진리 강조
역사/법 강조
터툴리안의 신학
주요 신학자
바네즈
수아레즈, 몰리나
루터, 보에티우스,
웨슬리
상수 (Constants)
기독론
높이 강조됨
높이 강조됨
강조됨/덜강조됨
교회론
제도화 된 모델
교회와국가가 밀착된 관계
신비적 공동체, 성례
제도적 모델, 사자
종말론
미래적 종말 강조, 개인적
실현된, 개인적
시작된 (임박한), 역사적(현세적)
구원
영적 관점에 치중, 교회를 통해서만
영적인 구원에 치중
영적인 구원에 치중
인간론
부정적
긍정적
부정적
문화
부정적, 반문화 모델
타블라 라사 접근을 따름
긍정적, 번역 모델
유교와 카스트제도 문화와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
부정적, 반문화모델
타블라 라사 접근을 따름
 
오늘의 선교 신학에 주는 의미
이 시기의 선교 특징은 정복과 대량학살과 강압 대 정의와 생존과 관대함, 착취와 경쟁과 이방성 대 존경과 상호성과 적응의 긴장과 극단화의 양면성이다.
정복과 폭력의 상황에 대항한 라스 카사스와 다른 선교사들은 엔코미엔다 제도, 인종 차별과과 같은 구조적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 구조 밖에서 일했다. 그들은 국가와 교회를 향해서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콘벤토 모델의 여러 변형을 통해 구조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원주민들의 존엄성, 문화, 삶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일하였다.
예수회 정착촌 모델은 두가지 접근 (구조 밖- 적응 과 구조 내-정복의 접근) 사이의 어떤 유형으로 모든 사람의 인간 존엄성과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방법으로 증거하였다.
아메리카에 있는 예수회보다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성공적인 아시아의 예수회 활동은 선교를 강압과 정복으로부터 분리하고, 상황에 적응시키며 상황화 하는데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마테오 리치의 중국에서의 문화화 혹은 상황화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1. 스페인의 로마 제국 통치기에 스페인에서 시작했던 종속 제도
2. 타불라 라사 : 인간이 태어날 때에는 정신적인 어떠한 기제도 미리 갖추지 않고 마음이 '' 백지와도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출생 이후에 외부 세상의 감각적인 지각활동과 경험에 의해 서서히 마음이 형성되어 전체적인 지적 능력이 형성 된다는 개념(위키백과)
3.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자로 추앙된 인물
5. 교황은 이 두 국왕들에게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교회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및 십일조를 징수할 권한을 주었다
6. 개연론은 인간은 절대로 확실한 지식(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개연적인 - 확실한 듯한 - 지식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이론(https://ko.wikipedia.org/wiki/개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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