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에서 희망으로

운명론에서 희망으로
 
2006. 11.24
들어가며
1. 1년전 오늘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나는가? 무엇 때문에 화내고 기뻐하고 불안해하고 자신만만해했는가?
3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 뜨거웠던 시사문제, 텔레비전 앞에 묶어두었던 사건들, 우리를 지배했던 그 일들,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떠한가?
 
2. 오늘도 세상의 종교지도자들과 대통령 정상들이 오가고 곳곳에선 크고 작은 전쟁이 터졌다 사라지고 사람들은 실직했다가 뒤늦게 재능을 인정받고 취업이 되기도하고 죽을 것 같은 병에서 놓이게 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등등 수없이 변하는 것들 속에 나의 부분들이 죽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되살아 나고 있는 것인가?
 
운명론에 속은 사람들
 
1. 운명론에 대한 웹스터 사전적 정의 모든 사건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앨버트 놀란은 Jesus Before Christianity에서 운명론은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사이에 만연한 태도다예를들면
대책없어..., 너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현실에 눈을 떠. 실제적이 되야지. ... 현실을 받아들여야 돼. 다 쓸데 없는 짓이야. 결국은 우리가 질 거야. 우리는 운명의 피해자야. 왠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
내가 자주쓰는 운명론적인 말이 있다면???
 
2. 운명론적인 사고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들:
-대인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선입견 적 사고 - 저 사람은 원래 그래” “저 사람은 늘 그런식으로 행동하지
-운명론은 빈곤, 전쟁, 압제 등 세계적인 이슈에에 대한 반응에도 영향을 미친다: - 이 사회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내가 관여할바가 아니지. 내가 끼어든다고 해서 도대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운명은 우리를 옥에 가두는 이름없는 힘이라는 것이 운명론의 주장이다.
-운명론은 가장 간교한 측면 중 하나는 우리가 치유를 반대하게 한다는 것이다. - 베데스다 연목 38년된 병자의 변명 - 치유의 물에 들어가려했으나 항상 너무 늦었다고 답하는 푸념을 늘어 놓는다. (5: 1-9)
 
운명론에서 벗어나는 길
 
1. 운명론의 반대 개념은 무엇인가?
 
과학적 운명론적 사상
-뉴턴의 역학법칙 발견후 f=ma 즉 힘=질양*가속도 인간도 하나님만이 안다고 생각했던 자연법칙을 알수있다. 자연 법칙에 따라 모든 사물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때만 필요한 것이고 그 이후 하나님이 만든 법칙에 따라 예정되로 운명지워졌다.
-하이젠버그의 불확실성원리 즉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리량(확대하면 정신사계의 사고량도 포함 가능)은 상충되는 현상을 갖으며 동시에 상충되는 물리량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즉 항상 확률적인 대답을 줄 수 있을 있을뿐이고 우리가 안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다. (: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 와 속도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철학적 운명론적 사상
이미 우리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운명적인 요소를 안고 태어나며 그 운명적 로드맵에따라 살아갈 뿐이다. 예를들면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것, 한국 사람으로 그리고 황인종으로 태어난 것 , 고조선시대가 아니고 정보화사회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긴 것, 키가 크고 작은 것 등 우리가 운명적으로 타고난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신의 조정에 의해 각자에 대한 운명적 로드맵에 따라 살아갈뿐이다.
 
2. 운명론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무엇인가?
낙관론자의 답변 : 전쟁은 끝날 것이다. 네 상처도 세월이 가면 아물 것이다. 우울은 사라질 것이다. 만사가 곧 좋아질 것이다.”
신앙인의 답변 :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현실속에 나타나는 현상 과 그 법칙들에 순응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앞으로 벌어질 일의 세부사항을 항상 묻지 않는 것이기도하다. 만일 내가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면 나의 믿음(기대)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 밖에 없다. 경이로움이 훨씬 약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이란 영적인 요소를 통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인간측면에서의 측정량이다. 반면 하나님 측면에서의 믿음의 결과(하나님의 은혜와 자연법칙)로 주어지는 측정량과는 상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신실함의 자리로 데려가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 방법 과 통로를 겪을때까지는 아직 모른다.
모든 것을 다 밝혀내려고 너무 매달리다가는 믿음의 정신을 잃고 만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결과를 믿음의 대상에게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믿는 법을 배운다.
 
시간속을 진리로 걸으며
 
1. 시간은 하나님을 기뻐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순간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우리들에게는 시간을 Chronos로 보려는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기쁨과 기도와 꿈을 위한 시간은 뒷전을 밀려난다. 그러니 시간의 경험속에서 때론 무력감이나 빈곤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2. 복음서는 때가 찬시간에 대해 말한다. 토머스 머튼은 성경은 때가 찬 시간을 중시한다.” 그때는 감정을 느끼는 시간이요, 추수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요, 때가 찬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인 크로노스에서 Chairos로 바뀐다. 카이로스란 기회 즉 계획한 목표를 위해 무르익은 순간을 뜻한다. 무르익음이란 때가 찬 사건의 성취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3. 우리는 극히 참을성 없는 문화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한다고 확신하는 계획과 프로젝트를 정해 두고는 이를 방해하는 일이 생기면 짜증을 낸다. 그러나 시간을 카이로스로 보면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다. 참을성 없는 마음의 이면은 권태다. 오늘은 그저 또 하루가 간다. 오해는 그저 또 하나의 한해가 된다. 모든 일이 이미 있던 대로다. 열처녀의 비유에서(25:3)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처녀 신랑이 빨리 오지 않을 때 푸념을 늘어 놓는다.
 
문이 열리며 미래가 다가온다
 
1. 마음에 희망이 있으면 우리는 삶의 분초 와 시간과 나날을 다르게 경험한다. 희망은 나라의 평화, 세상의 정의, 경제 호황에 달려 있지 않다. 희망은 부드럽고 유쾌한 순간뿐아니라 실망과 흑암의 그늘에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한다.
 
2. 손떼 묻은 편지 한통을 받아든 전쟁 포로는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빈약한 배급식량을 받아먹고 중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은 달라지지 안았지만 그에겐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음을 안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희망의 편지를 보내셧다.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너를 위해 집을 준비하고 있다. 내집에는 방이 많다. 너와 영원토록 함께 살기 원한다.”
 
참고도서 : 춤추시는 하나님 (헨리나우웬 저) 두라노 2006 25쇄 발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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